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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sembler Jun 10. 2020

미국 땅에 버려진 두 옷에게 안부를 전하며,

비움에 관한 이야기

만 원짜리 체크 원피스와 만 원짜리 회색 후드티.

만 원. 그 당시 내가 살 수 있는 최고가의 옷을 의미했다.




스물다섯 미국 어학연수 시기,

나의 소중한 체크 원피스와 회색 후드티도 당연히 함께 미국 땅을 밟았다.

만 원짜리 체크 원피스와 만 원짜리 회색 후드티는

내가 가진 옷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애 아이템들이었다.

20대 초반에야 어울릴 법한 미니원피스였지만 내 몸에 딱 맞았고,

세상 편한 회색 후드티는 매일매일 입어도 질리질 않았다.



4개월의 어학연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단짝 친구의 집에서 2주 정도를 지내게 되었다.

뉴욕 여행 짐을 싸던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에서 입을 옷들을 골랐다.




"이 옷들 재작년 한국에서 우리 놀 때 많이 입었던 옷 맞지?!"


좋은 걸 입고,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마음.

그러다 보니 좁은 선택지 안에서 내가 고르는 옷들은 늘 같았다.

내가 가진 최고의 옷이었지만, 덩달아 내가 가진 최선의 옷일 뿐이었다.


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삼사 년 전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나는 대부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날은 검정 체크 원피스에 검정 단발 생머리,

어떤 날은 검정 체크 원피스에 갈색 긴 파마머리-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듯 내 머리 길이도 내 머리 색깔도

같은 것이 하나 없었는데,

내 옷은 늘 그대로였다.




이번 여행만큼은 같은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나는 친구의 예쁜 옷들을 빌려 입고서 뉴욕을 여행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나는 그 두 옷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몇 년간 같은 옷에만 만족하던 내가 갑자기 안쓰러워져서,

좋은 날마다 사진 속의 내가 입은 옷들이 다 같은 게 싫어져서,

그 두 옷을 미국 땅에 버리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하나의 옷을 좋은 상태로 오래 입는 건 오히려 지금의 내게 자랑스런 일인데,

그때의 내게는 왜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게 그 행위(버리는 것)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은 이런 것에 아등바등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내가 원할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더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따금씩 그 옷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 당시 비워냄은 내게 가장 필요한 행위였고,

그 결정으로 인해 내 태도의 큰 부분이 바뀌었으니까.


'나는 가난해. 그러니 늘 아끼고 살아야 해. 버리면 안 돼.'라는 속삭임을

스스로 깨버린 순간이었으니까.


3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옷들이 떠오를 때면,

사진 속이나 기억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그 옷들을 생각하면,

괜스레 나 스스로 더 씩씩해져야겠단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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