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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간인 박씨 Jan 14. 2020

나의 시골살이 메이트


젊은 여성 혼자 씩씩하게 시골살이하는 이야기를 기대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기에는 걱정이 너무 많은 쫄보다.


의원면직도, 시골살이도 흔쾌히 허락한 엄마의 유일한 요건 역시 혼자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으로 일할 때 일단 직장을 유지한 채로 준비해볼까? 하고 인사 교류를 알아본 적도 있었고, 실제로 조건이 매칭 되는 분들과 연락이 닿은 적도 있었지만 혼자는 절대 안 된다는 엄마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내 시골살이 메이트는 햇수로 10년 된 남자 친구인데, 절대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다던 그는 끝내 서른이 되기 전에 나보다 더 먼저 내려와 시골살이의 터를 잡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직하면서 최소 3년을 준비하기 되리라 여긴 준비가 6개월 만에 끝나게 된 것도 남자 친구가 먼저 내려귀농인의 집: 흙집에 살면서 직접 발로 뛰어가며 벽돌집을 물색하고, 일자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리 잡은 벽돌집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먹으며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니 도시에서 생존용 카페인에 찌든 나는 배가 아파(?)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던 것이다.


그는 원래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쭉 살다 앞으로도 쭉 도시에서 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지겨운 시골살이 타령에도 인은 대형 쇼핑몰과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행복하다고 답하던 평범함 도시 청년이었는데, 난데없이  동참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4개월 선배가 되어 아직은 뭐든 서툰 나를 대신해 이것저것 잡일까지 든든하게 커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골살이가 고작 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일을 보러 도심에 나가면 차가 많아 답답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지친다며 시골 사람 다 된 양 말할 때마다 웃겨 웃음이 나오곤 한다.


남자 친구는 서울에서 n 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공무원 었고, 남자 친구는 공시생이었으니 사실 주위에서 하는 헤어져라 소리에 이래저래 스트레스도 많았다. 내가 평균보다 어린 나이에 합격한 걸 감안하고, 남성인 그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느라 불가피하게 생긴 간극을 두고 그러다 후회할 거라며 걱정을 가장한 악담하는 사람도 많았다. 엄마도 가만히 두는 내 연애를 왜 주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나중에는 그냥 누가 물어보면 직장 다니고 있다고 둘러댈 정도였다. 어찌 됐든 그는 19년 시험에서 OMR를 밀려 써 낙방했고 그러다 어찌어찌 내 시골살이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인데, 일을 하면서도 도전은 적어도 올해까지는 계속될 예정이다 쭉 :-) 공시 n 년 차가 떨어져도 세상에 돈 벌 일자리가 있고, 공무원 5년 차가 때려치우고 나와도 굶어 죽진 않았다.


수험 생활동안 홀로 공부하고 낙방을 반복하는 것은 사람의 심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n 년 차 동안 한결 같이 긍정적이다. 나는 사실 굉장히 염세적인 편인데, 낙천적인 영향을 받아 많이 맑아졌다. 예전의 내가 보면 참 대책 없고 한숨만 나올 상황에서도 '그래! 어떻게 살게 된다!' 하고 의연해지고,  훨씬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것도 '그래,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는 거지 뭐'하게 된다. 사람마다 저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그의 옆에 있으면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로 치환되곤 하는 것이다.  




10년을 연애했으니, 둘이 함께 생활하는 것 대하서는 양가의 반대가 심하진 않았다. 다만 결혼을 우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어른들의 매우 상식적인 요구가 있었고, 다행히 일단 살아보고 결정하겠다는 우리의 답을 존중해주셨다. 물론 얼굴을 보거나 통화를 할 때마다 대체 언제 결혼식을 올릴 거냐는 당연한 질문이 들리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 그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서울에서 번듯하게 학교 잘 다니고, 당연히 수도권에 자리를 잡으리라 생각했던 애들이 난데없이 시골에서 살겠다고 하니 말은 안 하셔도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집은 애초에 내가 노래를 부르고 다녔으니 체념하고 있었겠지만, 남자 친구의 집안에서는 아닌 밤 중에 홍두깨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그래, 이왕 결정한 일이니 잘 살아봐라!' 하시는 걸 보면 확실히 보통 분들은 아니다.


엄마도 내가 어찌 됐든 누군가와 함께 내려가 살겠다고 나가니 안심이신 모양이었다. 물론 딸을 보내는 감정에 시원함이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내 인생에 결혼도! 출산도 없다! 엄마 옆에 평생 붙어있겠다!'던 짐이 한쪽이라도 내려졌으니 조금 가벼워지셨으리라.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엄마 껌딱지인 나는 엄마에게도 도시생활 정리하고 사과 군으로 오시라 매일매일 삼고초려 중이다.




사실 도시에 계속 산다면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혼주의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건 주변에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실상을 봐왔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함께 근무한 언니들은 비교적 '여성'에게 좋은 일자리라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힘들어 했고, 제3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힘들었다. 회식과 야근이 반복될 때는 아이를 맡겨놓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봐야했고, 맞벌이면서도 왜 내 아들 아침 안차려주냐고 야단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월급에도 일이 많아 야근하면,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은 '애들 두고 그렇게 밖으로 나돌거면 때려치라'고 했단다. 또 한동안 아동 수당으로 고생하던 직원은 '다른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내 아이의 복지는 포기했다.'고 조근조근 말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냐고? 다 다른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결혼을 해서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보다, 제발 하지 말라는 조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우리나라의 보편적 정서 상 타인에게 행복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보다, 결혼 생활의 불만은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겠지만 안 그래도 복잡한 삶에 더 복잡한 셈 법이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나에겐 로망이라기 보다 무거운 속박처럼 느껴졌다. 벅찬 내 생활에 누군가가 추가되는 것도 두려웠고  파생되는 수많은 관계 역시 불확실성의 연속일 것 같다. 시골로 왔다고 당장 생각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환경이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고, 앞으로의 생활이 평안하고 고요하다면 속박처럼 느꼈던 제도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날이 오게 될까?


나와 시골살이 메이트는 앞으로 과연 어떤 형태로 살아가게 될까? 

시골은 나의 생각을 변화시켜 결혼이라는 제도로 기꺼이 뛰어들게 할 변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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