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올 때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집순이 + 90년대생답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내가 '시골 텃세를 감당할 수 있는 가'였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엄마조차도 괜찮겠냐며 걱정했을 정도다. 텃세로 고생하다 결국 도시로 돌아왔다는 귀농귀촌 후기는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심지어 옆 집 어르신들이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문을 벌컥벌컥 열고 거실로 들어온다는 얘기도 있었다. 후기 중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고향집에 내려갔던 젊은여성의 이야기였었나, 마을 사람들이 한 남자와 선을 보라고 매일 집 앞에 찾아온다는 얘기였다. 또 같이 청년 귀촌 교육 이수한 분의 마을은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게 대세라고 했다. 덕분에 주인 없는 집에 객이 먼저 와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전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후기의 결과, 처음 내려와 거의 일주일 동안은 남자 친구가 출근하고 나서 종일 커튼을 닫은 채 늦잠도 자지 못할 만큼 주위를 경계하고 지냈다. 집 주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혹시 누가 온건가?', '드디어 텃세를 경험하는 건가?', '막 밀고 들어오는 건가?' 하는 별의별 상상으로 혼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음, 그런데 막상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별관심이 없다. 텍스트로 경험했던 그런 종류의 일들 역시 아직까지 겪은 바 없다. 내가 유일하게 얼굴을 트고 지내는 마을 분은 옆집 할머니인데, 처음에 마당 잡초를 손으로 뽑는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 불쑥 나와 호미를 두 개 던져주면서 파 같은 채소는 할머니 네 텃밭에서 뽑아먹으라고 말씀하시고 쿨하게 가셨다. 어느 날은 해가 질 즈음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내려와 휴대폰으로 사진 보내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것저것 신상 물어보시고 가셨고, 그 이후 오며 가며 스몰 토크도 하고 서로 안부를 여쭤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만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 외에는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분은 여태 없었다. 물론 마을회관이나 주민총회에서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저 집에 새로운 젊은 애들이 이사를 왔더라, 전에는 뭘 했고 등.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묻는 사람도 더 이상 없었고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는 듯하다. 다른 주민분들도 산책을 하며 마주치면 젊은이를 이뻐라 하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주시긴 해도 개인적인 선을 넘어 침범하시는 분은 여태 없었다.
사실 어르신들이 보기에 우리는 너무 어려 관심이나 텃세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주민들과 마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 인근에 울타리를 치거나 이것저것 꾸민다고 원래 있던 자연의 모습을 훼손하지도 않고 - 슬프게도 내 집이 아니라 마당과 잔디를 비롯한 곳에 따로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마을 대소사에 이렇다 저렇다 소리를 내지도 않기 때문에 흔한 말로 아웃 오브 안중인 것 같다. 우리 같은 꼬꼬마들은 어르신들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타부타 말이 많은 마을회비도 기꺼이 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도통 내라는 말씀도 없다.
다만 다소 불편한 것은 궁금한 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의 시간표는 왜 저 모양인지(하루에 오가는 버스가 세 대 뿐인데 시간표와 영 안 맞아 번번이 탑승에 실패했다), 길 앞에 텃밭을 개간해도 되는 건지. 심지어 최근에 바뀐 새로운 이장님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다. 도시에선 토도독 손가락을 두들겨 검색하면 척척 나오던 정보가 여기는 면 대 면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려온 후 별 일 없이 쉬고 있는 나조차도 이렇게 간혹 답답한 일이 생기는데, 제대로 귀농을 하신 분들이라면 마을 분들의 잡다한 도움이 없다면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이렇게 마을의 아-싸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마을분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람 사이에 당연하게도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다고, 필요한 것이 많았다면 마을 분들에게 더 살갑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결국 버스를 포기하고 스쿠터를 구매해서 산골짜기를 신나게 내달려 읍내까지 다닌다.
하지만 타고난 집순이가 갑자기 인-싸가 될 리는 없었다. 사회생활을 싹싹하게 해내고 처음 만난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척척 하기도 하기 때문에, 실상은 낯 가리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진이 쪽 빠진다는 주장을 다른 사람들이 잘 믿어주지 않지만 정말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기가 쭉쭉 빨려 눈이 퀭해지는 잘 사회화된 아-싸일 뿐이다. 마을마다, 시골마다, 구성원들마다 텃세의 형태와 정도는 다 다를 테지만 적어도 우리 집은 현관문이 철문이니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서는 문을 벌컥 여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 차후 나까지 일을 하게 되면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 없을 테니 도시에서와 비슷한 정도의 이웃-관계망을 유지하고 살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시골마을 텃세는 목욕탕 터줏대감 아줌마들의 텃세보다 약하고, 그에 앞서 관심이 별로 없다.
덕분에 여태 집순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다.
** 심지어 마을에서 사람 구경하는 것도 어렵다. 거실 전면 창 커튼을 활짝 열고 있어도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을 볼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경계하는 마음은 사그라들고 오히려 지나가는 차를 보면 '아, 그래도 이 동네에 사람이 살긴 사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아파트에서는 옆 집이 오고 가는 현관문 소리, 윗 집의 아이들 발소리, 새벽 늦은 시간 화장실 배관 소리, 창문을 열어놓으면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이 곳에서는 창문을 열어도 들리는 소리가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흐르는 계곡물 소리뿐이다. 이제는 늦잠도 잘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