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해외로 유학 보내주세요.”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떤 학교에 가고 싶은지,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한 미래가 그려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이 있었다.
혹은, 한국에서의 입시 실패로 도망가고 싶은 장소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을 선택한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가깝지만 다르고, 익숙한 듯하지만 분명히 다른 나라.
어딘가 도전하기에 적당한 거리라고 느꼈다.
유학을 결심한 뒤의 나는 의외로 차분했다.
설렘이 70이라면, 두려움이 30쯤 섞여 있었다. 일본어 학원에 다니고, 비자를 준비하고, 학교를 알아보며 현실적인 절차를 하나씩 밟아갔다. 서류를 준비하는 시간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준비가 끝난 뒤였다.
비행기 표를 끊고, 짐을 싸고, 주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감정의 비율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설렘 50, 두려움 50. 기대와 불안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출국 당일, 공항 게이트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선택은 끝났고,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도시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왔던 장면이라 그런지 크게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내가 영화 속 배경에 잠시 들어온 느낌이었다.
진짜 시작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였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사람들, 새로운 교실, 빠르게 오가는 일본어.
그때 나는 ‘긴장’이라는 감정을 처음 크게 느꼈다. 설렘은 점점 줄어들고, 긴장이 자리를 채웠다. 혹시라도 말이 막히면 어쩌지,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머릿속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찼다.
처음 한 달은 생존의 시간이었다.
수업을 따라가고, 숙제를 해내고, 일상적인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기보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가 더 피로했다.
그러다 어느 날, 긴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대화 속도를 조금 더 따라갈 수 있게 되었고, 농담도 한 박자 덜 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잠깐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 이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함께 웃고 떠들고 있지만, 어딘가 완전히 섞이지 못한 느낌.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위치’에 서 있었다.
표현 하나를 더 고민하고, 말투 하나를 더 신경 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감정은 ‘긴장’에서 ‘고립감’으로 바뀌었다.
수업이 끝난 뒤의 저녁이 특히 그랬다.
집에 돌아오면 하루 종일 쌓여 있던 감정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도 연락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허전해졌다.
외로움은 시끄럽지 않았다.
아주 조용했고, 그래서 더 또렷했다.
몸이 아팠던 날, 혼자 병원을 찾아가며 느꼈던 막막함.
행정 절차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이나 검색을 반복하던 밤. 그 작은 일들이 나를 자주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왔지?’
그 질문에는 후회가 조금, 자존심이 조금, 그리고 책임감이 많이 섞여 있었다.
돌아갈 수는 있었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 감정은 다시 변했다.
고립감은 점점 ‘의지’로 바뀌었다.
완전히 섞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실력으로는 밀리지 말자.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나는 더 공부했고, 더 관찰했고, 더 신중해졌다.
관계에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혼자 있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으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시간이었다.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나는 점점 단단해졌다.
일본 유학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설렘 → 긴장 → 고립감 → 의지.
감정은 그렇게 천천히 변해갔다.
그리고 그 변화의 끝에서 나는 깨달았다.
외로움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시험하기 위해 온 감정이라는 것을.
그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도쿄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과 부담감도, 어쩌면 그때와 닮아 있다.
낯선 환경, 보이지 않는 벽, 외국인이라는 정체성.
하지만 하나는 다르다.
그때의 나는 처음이었고, 지금의 나는 그 어려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안다.
그 시절의 조용한 저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일본 유학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 덕분에
나는 결국,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