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엄마

by 레실

사람들은 히어로를 떠올리면 특별한 능력이나 극적인 순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 히어로는 언제나 아주 현실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엄마다.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이후, 집안의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누구도 크게 울지 않았고, 누구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하듯 무거운 침묵이 집 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가장 오래 견뎌낸 사람은 언제나 엄마였다.

병원과 직장, 그리고 다시 병원을 오가며 엄마는 하루를 쪼개 살았다. 아버지 앞에서는 괜찮은 사람처럼 웃었고, 내 앞에서는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사람이 슬픔을 숨긴 채 살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지.

아버지가 떠난 날 이후에도 엄마는 멈추지 않았다. 울 시간조차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정리했고, 남겨진 나와,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일상으로 끌어올렸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을 엄마는 묵묵히 버텨왔다.

내가 일본 유학을 선택했을 때도 그랬다. 확신 없는 선택이었고, 실패의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떠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는 또 하나의 ‘떠남’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선택한 거면, 끝까지 해봐.”

그 말은 단순한 응원이 아니라, 나를 향한 믿음이었다.

일본에서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흔들렸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묻지 않았다. 잘하고 있는지, 언제 돌아올 건지. 대신 늘 같은 말을 했다.

“아들이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엄마도 버틸 수 있는 거야.”

그 짧은 문장은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보면 엄마는 한 번도 영웅처럼 행동한 적이 없다. 다만 도망치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으며, 가장의 역할을 대신해 끝까지 삶을 떠받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진짜 히어로는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묵묵히 지탱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히어로는 늘 집에 있었다. 이름도, 능력도 특별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강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으며 조금씩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전 01화그날 이후의 선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