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보다 어려웠던 건 ‘관계’였다

by 레실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단연 ‘언어’였다.

문법은 나름대로 준비했고, 단어장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막상 공항에 내려 처음 마주한 일본어는 교과서 속 문장과는 전혀 달랐다. 빠르게 지나가는 방송 멘트,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할 때조차 긴장했다.

“袋はいりますか?”라는 짧은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해 몇 초를 멈춰 서 있던 순간.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언어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조금만 더 버티면 익숙해질 거라고.


실제로 일본어는 조금씩 늘어갔다.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발표도 무사히 마쳤다.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전달은 되었다. 실수를 해도 다시 말하면 됐다. 언어는 노력한 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정말 어려운 건 언어가 아니었다. 관계였다.


말이 통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통하는 건 아니었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고, 같은 과제를 하면서도 나는 어딘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 같았다.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지만, 웃음이 터지는 순간마다 내가 왜 웃어야 하는지 늦게 이해했다. 농담의 결이 달랐고, 침묵의 의미도 달랐다.


나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라도 분위기를 깨지 않을까 봐 말을 아꼈고, 혹시 무례하게 들릴까 봐 표현을 고쳤다.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는 몇 번이나 읽어봤다. 단어 하나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지, 내가 너무 나서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지 계산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들이 이곳에서는 확신이 없었다.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하는 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솔직한 의견이 공격적으로 들리지는 않을지. 나는 늘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외국인 유학생이지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 어색하지 않은 사람,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


그래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웃었다.

관계 속에서도 나는 성실하려 했다. 더 일찍 도착하고,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배려하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관계는 노력의 양으로만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마음의 거리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분명한 간격이 존재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혼자인 느낌. 다 함께 웃고 있는데, 나만 조용히 숨을 고르는 순간들.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이 흔들렸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좀 더 밝게 굴어야 할까.’

‘괜히 나만 예민한 건 아닐까.’


관계에서의 고민은 언어 실수보다 훨씬 깊게 남았다.

발음이 틀린 건 고치면 되지만,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일본에서 일본어만 배우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곳의 방식으로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배려, 돌려 말하는 거절, 침묵 속의 동의.

그 미묘한 결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수없이 혼자 고민하고, 혼자 반성하며 조금씩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필요는 없다고, 모든 자리에서 자연스러울 수는 없다고 인정했다.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서툴면 서툰 대로 있어보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관계가 조금씩 편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실수를 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침묵이 이어져도 견딜 수 있었다. 나를 다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대신 몇몇 사람과는 천천히, 깊게 가까워졌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일본에서 일본어도, 관계도 동시에 배우고 있었다는 것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법과, 마음을 조심스럽게 건네는 법을 함께 익혀가고 있었다.


언어는 반복하면 늘었고, 관계는 부딪히며 자랐다.

둘 다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둘 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긴장한다.

여전히 눈치를 보고, 때로는 혼자 고민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는다. 모든 관계에 정답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타국에서의 삶은 시험 점수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누구와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상처받았는지, 그리고 다시 어떻게 말을 걸었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일본에서 언어 이상의 것을 배웠다.

완벽해지려 애쓰기보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용기를.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다.

괜찮아.

조금 느려도, 조금 서툴러도, 그렇게 배우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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