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늘 대비하고 있다

by 레실

겉으로 보기엔 나는 꽤 안정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맡은 일을 크게 문제없이 해내고,
주말에는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다음 주를 준비한다.
누군가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생각할 틈도 없이 “괜찮아”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다. 정말 큰 불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무너질 만큼 힘든 상황도 아니다.


다만 그 ‘괜찮음’의 이면에는
항상 대비하고 있는 내가 있다.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상황을 먼저 떠올린다.
회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계획이 틀어지면 어떤 선택지를 꺼내야 할지,
누군가 실망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까지
머릿속에서 미리 리허설을 돌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한두 번은 다 겪고 나온 사람처럼 피곤해질 때가 있다.


이런 성향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했던 경험들,
준비가 부족해 후회했던 순간들이 쌓여
‘미리 생각해두자’는 습관이 되었다.
대비는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고,
불안을 줄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계획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일정, 루틴, 해야 할 일 목록이 정리되어 있으면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반대로 계획이 흐트러지거나,
예상과 다른 변수가 생기면

겉으론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에서는 조용히 긴장이 쌓인다.


이 불안은 쉽게 티가 나지 않는다.
대신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머릿속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굴고 싶지 않아서
그 감정들을 대부분 혼자 처리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능한 한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분위기를 깨는 말보다는
조율하는 말을 고르고,
내 감정보다는 상대의 상황을 먼저 고려한다.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불편한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참는 게 기본값이 되면,
불편함은 설명되지 않은 채 쌓인다.
괜찮은 척은 점점 쉬워지는데,
솔직해지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늘 ‘다음’을 먼저 살고 있는 걸까.
오늘의 안정은 내일의 불안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처럼 느껴지고,
현재의 평온조차 잠시 후 깨질지도 모른다는 가정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오히려 긴장되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의 방식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대비하며 살아온 덕분에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다.
실수를 줄였고, 선택의 폭을 넓혔으며,
위험한 상황을 미리 피할 수 있었다.
대비는 나를 망가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를 지켜주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대비하지 말자’가 아니라
‘과도하게 몰아붙이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불안을 해결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조금씩 연습 중이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만
삶을 살아도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우고 싶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도
그때의 나도 분명 어떻게든 해낼 거라는
작은 신뢰를 가져보려 한다.

여전히 나는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나 자신에게만큼은
굳이 괜찮은 척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겉으론 안정적이지만
속으로는 늘 대비하느라 지쳐 있다면,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을
조금은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모든 것을 대비하지 않아도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잘 살아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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