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썬은 비교적 쉽다는 말에 속아서 (2)
나의 선생님은 모니터 속에 살고 계셨다. 파이썬을 배우는 동안 깍듯하게 모시게 될 우리 선생님은 목소리마저 낭랑한 분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내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주피터 노트북 설치. 그때 나는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 돌리기 세 번을 하고 다시 앉으라고 해도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상태였다. 강의 영상을 플레이하며 흘러나온 선생님의 '안녕하세요' 인사와 동시에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 모드로 완벽하게 진입해 있었으니까. 밤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주피터 노트북을 설치하라는 것뿐인데 당연히 해야지. 화면을 보고 따라가며 열심히 설치를 했다. 설치하는 동안 내 몸의 움직임은 마우스 클릭질이 전부였지만 설치를 마치고 나니 황량한 벽에 선반 10개를 설치한 사람 마냥 뻐근함이 느껴졌다.
18분 37초 분량의 첫 강의는 주피터 노트북 설치와 간단한 사용법 설명이었다. 16분 46초가 지날 무렵, 선생님은 Shift + Enter 키를 누르면 셀이 실행되고 커서가 다음 셀로 이동하며, a 키를 누르면 위에 셀이 추가되고, m 키를 누르면 문서 셀로 변경되고... 등등의 사용법 정리를 시작하셨다. 기억해야 될 정보가 한 화면에 정리되어 눈앞에 펼쳐진 상황. 16분 46초 전의 내 마음가짐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이렇게 정리해주시는 선생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외웠겠지만, 내 마음은 어쩌자고 이렇게 빠르게 변한단 말인가. 눈앞에 가득 펼쳐진 정리 자료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일렬로 단정하게 줄 서 있는 저 녀석들을 다시 분해해서 이곳저곳에 산발적으로 흩트려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야 '어머, 난 너희가 거기 있을 줄도 몰랐네? 있는 줄 알았다면 외웠지. 안 그래?'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하다 보면 익혀질 테지만 '하다 보면'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하다 보면'의 실천을 위해서는 저걸 외워야 하지 않을까. 암기력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부족한 나였다.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지만 강좌 수강을 위해 결제한 육만 육천 원이 떠올랐다. 아, 이래서 무엇을 배울 때는 돈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구나. 육만 육천 원어치의 공부는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나는 암기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지금까지 써왔던 스킬을 모조리 동원했다. 문서 셀로 변경할 때 쓰이는 m은 문서의 미음(ㅁ)과 연결하고, 위에 셀을 추가할 때 쓰이는 a는 above에서 나온 게 아닐까 추측하는 등등. 그래도 끝까지 외워지지 않는 녀석들은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 옆에 붙여놓았다.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인 모니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쩜 그렇게나 빨리 포기를 생각했을까. 내가 좀 그런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업을 시작한 지 16분 46초 만에 때려치울까 생각했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눈치채서는 안 된다. 얼른 그다음 차시를 클릭했다. 흔들림 없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내가 품었던 불량한 생각을 전혀 모르시는 게 틀림없다. 나는 다시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학생 모드로 전환을 시도했다. 뭐 하나 따라 할 때마다 포스트잇을 힐끔거려야 하긴 했지만.
파이썬은 초보자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라고 했는데, 쉽게 배울 수 없는 나는 초보자가 아니었나 보다. 초보자도 되지 못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로는 뭐가 있을까. 문득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던 것이 떠올랐다.
머리를 손질하는 도구로 다이슨 에어랩이 급부상하던 때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똥손인 내게는 '똥손도 에어랩만 있으면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다'는 후기가 자꾸 보이던 시기였다. 사용자 데이터를 분석한 맞춤 광고에도 에어랩이 뜨던 그때. 나는 인공지능에게 내 입장을 설명하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가난한 월급쟁이라서 그런 고가의 물품을 구입해서는 안 된다고, 인터넷에서 장을 보다가 에어랩 상세 페이지에 잠깐 머물긴 했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다고, 다이슨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 에어랩을 살 생각이 없으니 나를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내 발자취를 편협하게 분석했고, 나는 인공지능이 들이미는 에어랩 관련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똥손도 할 수 있다는 후기에 살짝 흔들리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똥손이라도 다 같은 똥손이 아니라는 진리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똥손 세계 선수권 대회에 나가더라도 충분히 상위 입상이 가능한 엉망진창 똥손이다(머리 손질 분야에서만 그렇다. 믿어주시라). 단순한 드라이기조차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머리를 감은 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는 것이 내 머리손질의 전부다. 스스로 똥손이라고 칭하는 후기의 주인공들을 나와 같은 레벨의 똥손으로 격상시켜주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봤지? 나 에어랩 끝까지 안 사는 거! 네가 뭘 몰랐던 거라고.' 하며 융통성 없는 인공지능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가히 나와 비슷한 수준의 똥손이라 할 수 있는 분의 후기를 접해버리고 말았다. 영상 속의 그녀는 나처럼 굵고 거친 모발을 가지고 있었다. 딱 나와 비슷한 머리 길이였다. 에어랩을 잡은 엉성한 손 모양새하며 모발을 감는 방향을 헷갈려하는 것까지 나와 너무 비슷해 보였다. 그런 그녀가 우물쭈물 에어랩을 머리에 몇 번 갖다 댔을 뿐인데 세상에나, 이런 마법 같은 일이. 며칠 뒤 우리집으로 도착한 택배 박스에 에어랩이 들어있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의 에어랩 사용 후기도 궁금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머리 손질 똥손 선수권 대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다.
'비전공자를 위한'이라는 단서가 붙은 책이나 강의를 보고 '정말?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분야였단 말이야?'하며 시작한 공부지만 똥손에도 레벨이 있듯, 비전공자에게도 레벨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큰 마음먹고 시작한 파이썬 공부가 에어랩 꼴이 나도록 내버려 둘 수야 있나. 초보자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파이썬과 똥손도 할 수 있다는 에어랩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내려다보며 끌끌 혀를 차고 있지만 파이썬만큼은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꾸 에어랩과 손을 잡으려는 파이썬에게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고 해야 하는데, 파이썬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요소가 왜 이렇게 많은지. 아마도 파이썬은 슬슬 눈치를 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정말 바쁜 것도 아니면서 바쁜 척하느라 내 연락이 뜸하다는 사실을.
강의 진도율은 10% 언저리에서 도통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50%도 아니고 10%라니. 헛소리 생산 공장을 가동하여 '시작이 반이잖아요? 전 이미 50%를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요.'라고 말하기엔 모니터에 붙어있는 포스트잇 보기가 부끄러웠다. 가까스로 외웠던 몇 가지 단축키마저 잊혀가고 있었다. 포스트잇도 에어랩과 한 편이 되어 나를 무시하려 들 기세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 무슨 인증 챌린지라는 것이 있다던데 그런 거라도 해봐야 하나. 흐지부지되고 있던 파이썬 공부를 다시 일으켜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획한 분량을 공부했는지 체크해주는 사람이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아,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 역할에 안성맞춤인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바로 그 사람을 나의 파이썬 공부로 끌어들였다.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