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수첩부터 바인더, 에버노트, 원노트, 구글킵, 워크플로위, 노션까지

by 책다람쥐

| 기록을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몸에 착 붙은 사람들이 있다. 필요할 때마다 손쉽게 찾아 쓸 수 있도록 기록을 잘 정리해두기까지 하는 사람들. 그들을 부러워하는 일이 내 전공이었다. 비슷하게 흉내 내 보려고 시도하는 건 부전공이었고.


고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지만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장비빨의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다. 내게 메모 습관이 없는 이유는 내게 맞는 적당한 수첩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수첩 쇼핑을 시작했다. 펼쳤을 때의 크기와 접었을 때의 두께, 펼침 정도, 속지의 질감과 두께 등을 살펴보는 나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내게 관찰력과 판단력이라는 게 있다면 수첩 쇼핑을 위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구입 대상 수첩을 살펴보는 내 눈빛과 마음가짐은 노벨 수첩쇼핑상을 수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위 문단에 이어질 내용으로 무엇을 예상할까.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구입한 수첩은 첫 장만 조금 끄적거려지다가 어느새 방치되고 말았다는 내용일까, 아니면 공 들여 구입한 수첩인 만큼 열심히 잘 썼다는 내용일까. 공감하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했다. 수첩 구입에 열을 올리더니 갑자기 메모의 대가가 되었다는 비약적인 전개에 공감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내가 수첩만 사놓고 메모를 하지 않은 것은 공감하기 쉬운 글을 쓸 수 있도록 온 우주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 포기가 안 되는 상황 |

우주의 보살핌 속에서 나와 메모 습관 사이의 거리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종류별 수첩 구입 비용을 생각하면 조금 더 가까워져도 좋았겠지만 우리의 거리두기는 철저했다. 기록해두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내 손엔 수첩이 없었고, 수첩을 가진 날에는 볼펜을 꺼내는 것이 귀찮았다. 어쩌다 드물게 수첩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날이 었어도 그 내용을 다시 찾아보고 싶은 날에는 수첩의 행방이 묘연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의욕이 뚝뚝 떨어졌다. 애초에 의욕이 있긴 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잘 안 되면 그냥 하던 대로 살자고 포기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메모와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작년에도 이 일을 할 때 여기서 버벅거렸는데 그때 어떻게 했었는지 좀 적어둘걸', '마지막으로 치과에 간 게 언제지?', '(사과를 먹으며) 유치원 다닐 때 애가 사과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뭐였더라?', '도대체 이거 처음 배울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그런 걸 좀 적어두지도 않고 뭐 한 거야!' 등등.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메모는 일정이나 투두 리스트 작성 분야가 아니었다. 그런 메모 없이는 아예 일상이 돌아가지 않으니 '워킹맘이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메모' 레벨에서는 나도 꽤 경험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메모는 일단 완료하고 나면 다시 찾아볼 일이 거의 없다. 잘 정리해서 보관해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미래의 내가 다시 들춰봤을 때 도움이 되는 메모가 필요했다. 과거의 기록을 보며 인사이트를 얻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뭐라도 적어두면 도움이 될 것 같긴 했다. 내 망각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손으로 쓴 메모라도 빠른 시간 안에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 한 달 이상이 지나면 '내가 언제 이런 걸 썼지?' 하며 완벽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메모를 볼 수 있다. 1년 전 메모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기원전 5천 년경 고대 인류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인류 취초로 발견한 고고학자의 흥분을 느끼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1년 뒤의 나를 위해 기원전 5천 년 경이 될 오늘의 메모를 유물로 남겨두는 일은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 수첩, 바인더, 에버노트, 원노트, 구글킵, 워크플로위, 노션 사용자가 되다 |

포기하지만 않으면 느린 걸음일지언정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던가. '부러워하기'와 '흉내내기'는 월중행사표에 적어놓기라도 한 듯 정기적으로 실천되었고, 덕분에 메모를 위한 나의 도구는 갈수록 다양해졌다. 수첩과 바인더뿐만 아니라 에버노트, 원노트, 구글킵, 워크플로위, 노션까지. 어느 것 하나 대단히 멋지게 사용하고 있진 않지만 어설프게나마 내 목적에 맞는 도구 모음이 갖춰진 느낌이다. 수첩을 쓰다가 순서 변경의 자유로움이 필요해서 바인더를 샀고, 아날로그 방식은 검색이 되지 않아 에버노트를 다시 쓰기 시작했으며, 업무용 자료 인쇄의 필요성 때문에 원노트를, 포스트잇 형식의 자잘한 메모를 위해 구글킵을, 생각의 확장을 위해 워크플로위를, 아이와 함께 관리하는 공유 페이지를 위해 노션을 쓴다.


이렇게 여기저기 흩어놓지 말고 자유도가 높다는 노션에 합쳐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내겐 각각의 용도가 너무 명확했다. 만능 문구용품 하나로 길이도 재고 종이도 오리고 붙이기보다 길이를 잴 때는 줄자를, 종이를 오리고 붙일 때는 가위와 풀을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용도를 구분하여 수첩, 바인더, 에버노트, 원노트, 구글킵, 워크플로위, 노션을 모두 쓰고 있다는 말이 나를 부지런히 메모하는 사람으로 둔갑시킬까 봐 말해둔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메모와 기록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지 8년 째인 것을 감안하면 이제 메모계의 한 획을 그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좀 적어둘 걸'하고 아쉬워하는 순간을 종종 맞이한다. 특히 언제 저렇게 커버렸나 싶은 아이와 관련해서는 기록 부재의 아쉬움을 느끼는 횟수가 더 잦다.



| 우리의 진로탐색 과정은 노션에 기록된다. 아주 가끔씩. |

사진을 찍어두면 아이의 겉모습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아이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다. 우리가 나눈 대화와 내가 관찰한 아이의 특징을 누적, 기록해나가고 싶었다. 나만 쓰는 게 아니라 아이도 진로 탐색을 위한 자기 이해 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함께 기록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렇게 하면 좋겠어'라고 말한다고 애가 그걸 바로 실천에 옮길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주 드물게 그게 가능한 어린이도 있겠지만 대개 그런 어린이들은 우리 집이 아니라 다른 집에 산다. 게다가 우리 집 어린이는 의욕과 실천이 별개라는 사실은 몸소 보여주는 엄마와 함께 살지 않나. 야심 차게 시작했다가 흐지부지 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 나아가 이 엄마는 뻔뻔하게도 '흐지부지 될 게 두려워서 시작도 안 하는 것보단 일단 시도해보는 게 백번 낫지!'라고 말한다. 금세 흐지부지 될까 봐 아이와 함께 기록하는 노션 페이지를 브라우저 시작 화면으로 설정해두는 꼼수까지 쓰면서 말이다.


화면 캡처 2022-08-21 005215.jpg 아이와 내가 공유하는 페이지의 일부


우리는 노션을 브라우저 홈 화면으로 설정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이 화면이 보이는데 설마 한두 번 기록하고 흐지부지될까 싶었다. '이 달의 성장기록'이라는 항목에서 볼 수 있듯 매일 기록하겠다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자기 분수를 아는 자의 소박한 마음이 엿보이지 않는가. 다른 페이지에 분기별 기록과 방학 때만 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일 년에 네 번, 두 번 정도쯤이야. 기록쟁이를 동경하며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이 정도도 못할까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위 문단에 이어질 내용으로 무엇을 예상할까. 브라우저 홈 화면 설정까지 해두었으니 한 달에 한번 쓰기 정도는 실천하고 있다는 내용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안 되고 있다는 내용일까. 수미쌍관으로 설명되는 구성법이 있다. 수첩을 구입해놓고 잘 사용하지 못했다는 첫 부분에서 연상되는 마무리를 생각해보시라.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의 관찰기록'을 쓰지 못한 것은 수미쌍관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온 우주가 다시 한번 도와준 덕분이 아닐까.


집요한 우주의 보살핌 속에서 나는 여전히 메모를 습관화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수첩을 꺼내 들었다'라던지, '자연스럽게 노션 페이지로 향했다'와 같은 문장을 너무나도 쓰고 싶지만 도무지 쓸 일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노션을 잘 쓰고 있냐고 물으면 '잘 쓴다고 하기엔 좀...' 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첩, 바인더, 에버노트, 원노트, 구글킵, 워크플로위, 노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각각의 도구에는 나의 기록이 아주 가끔씩 쌓여간다. 아이는 브라우저의 시작 화면을 가볍게 무시하고 새 창의 띄우는 엄마도 보지만,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엄마도 본다. 가끔은 '세상에! 작년에 네가 이런 말을 했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라며 호들갑 떠는 엄마를 진정시키는 역할도 한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자기도 내년의 놀라움을 위해 올해의 기록을 만들어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모른다.


Photo by Rubaitul Aza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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