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대비를 위한 내 아이 진로 지도

<아무튼 출근>을 함께 보며

by 책다람쥐

| 용하다고 소문난 곳에 가서 물어보면 정말 알 수 있나요 |

고등학생을 키우는 학부모가 아이 손을 잡고 철학관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다. 대입 원서 작성 시 어느 과를 쓸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곳까지 다녀왔을까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철학관에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의 앞날은 모른다고 했다. '절대'를 함부로 남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으며, 내가 언제 '절대' 안 간다고 했냐고,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우겨댈지도 모를 일이다.


꼼꼼하게 치수를 잰 맞춤복처럼 나에게 딱 맞는 진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하다. 직업의 종류가 그렇게나 많다는데, 내가 몰라본 일 중에 나에게 딱 맞는 일이 존재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맞춤복 제작을 위해 팔 길이, 어깨 넓이, 목둘레 등을 측정하는 것처럼 맞춤진로 설계를 위해 내 성격, 흥미, 능력을 밀리미터 단위로 잰 뒤 내 적성에 안성맞춤인 일을 '짜잔'하고 알려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나는 헛꿈 꾸기에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진로 탐색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대목을 꼭 만나게 된다.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자신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전국의 수많은 치킨집 사장님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분들일까? 자신을 잘 들여다본 결과, 치킨을 좋아하고 닭 튀기는 것을 잘한다는 결론을 내린 분들일까?



| 내 노후 대비를 위한 진로 지도 |

노인빈곤율이 높다고 소문난 나라에 살면서 일을 자아실현의 수단으로만 보는 낭만적 시각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생계유지를 위해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라도 찾아온다. 수입이 없는 시기가 오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나 고민하다가 아이의 진로 지도에도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노후대비에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니까. 힘겹지 않은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아이는 늦지 않은 시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나의 노후 계획에는 30대 캥거루족이 된 아이를 먹여 살리는 시나리오가 포함되지 않았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엄마를 통해 직장인의 삶을 엿본다.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잠자리 대화 시간에는 직장인의 희로애락이 전달되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진로 고민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일의 속성이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 일의 즐거움이 월급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 하지만 월급이 적으면 머리 아픈 일이 많이 생긴다는 사실도 대화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대화의 마무리는 대개 간지럼 태우기다. 영유아기 시절부터 이어진 간질간질 놀이와 함께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귀여울 예정이냐는 물음이 이어진다. 딱히 대답을 바라는 물음은 아니었지만 친절하게도 자기는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귀여울 예정이라는 대답을 해준다. 귀여운 할머니가 된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내 상상에 디테일을 더하기 위한 추가 질문과 함께. "그런데 할머니 됐을 때는 뭐 먹고살 거야?"



| 자기 이해와 직업 세계 이해 |

진로 지도의 두 축은 자기 이해와 직업 세계의 이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단기간에 끝낼 수는 없다. 고가의 검사를 받는다고 해서 자기 이해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직업 세계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에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이해를 위한 각 시기별 노력이 누적될 뿐이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 대로, 40대인 나는 나 대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자기 이해와 직업 세계 이해를 위한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부러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한 직업 세계를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해 알아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애널리스트의 삶이 궁금하다고 증권거래소에서 직접 그 일을 해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책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간접 경험의 통로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도서관에 가면 직업과 일에 관한 책도 유심히 살핀다. 어린이 자료실에서는 이용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이 눈에 띈다. 서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도 표가 난다. 책등이 너덜너덜하기 때문이다. 유독 책등이 너덜너덜하다 싶은 책은 대부분 만화책이다. 그중에는 일의 세계에 관한 책도 있었다. 제목을 훑어보니 꽤 다양한 직업을 다루고 있었다. 한 권을 뽑아 읽어보았다. 많은 정보가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었지만 만화로서 재미를 갖추기 위한 작위적 설정도 눈에 들어왔다. 함께 간 아이 옆에는 벌써 다 읽은 만화책 두어 권이 쌓여있다. 보충 설명 페이지는 없는 셈 치고 그냥 넘겼겠지. 그러니 저렇게 빨리 읽었겠지. 아이는 만화라는 이유 만으로 이 시리즈의 책등이 너덜너덜해지는 데 일조할 것이 분명했다.


아이와 함께 읽고 직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책이 필요했다. 이 책 저책 뒤적여봐도 내 필요에 딱 맞는 책은 없었고, 문득 '아무튼 출근'이 떠올랐다.



| 아무튼 출근 |

유튜브에서 진로 관련 영상을 찾다가 '아무튼 출근'을 보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직장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직업 세계 이해에 도움을 주는 수업 자료로도 활용 가능해 보였다. 보강 들어갔을 때나 진도를 마친 학기말 수업에 쓸 요량으로 관련 활동지도 하나 만들어두었다. 그 활동지를 초등학생용으로 수정해서 아이에게 시켜보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 집 아이용으로 수정된 활동지에는 '어떤 일을 하는 장면이 나왔나요?', '(영상과 관련하여) 미래의 내 일도 가졌으면 하는 특징은?', '미래의 내 일이 피했으면 하는 점은?' 등을 적어 넣는 빈칸이 있다. 학교에서는 기껏해야 두 개 정도의 영상을 보고 활동지를 채웠다. 45분 안에 마쳐야 했고 최대한 교과와 관련된 영상으로 고르다 보니 한 차시 이상 할애할 일도 없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질은?'과 같이 조금 더 생각해야 할 질문도 있어서 활동지 작성 시간도 빠듯했다. 집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시간을 융통성 있게 쓸 수 있는 곳이다. 여러 날에 나누어 틈틈이 시청을 하다 보니 활동지에는 수십 종류의 일에 대한 아이의 생각이 쌓여갔다.


외근이 많이 나온 영상을 보고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 좋다'라고 하거나 두 명이 함께 사업을 하는 영상을 보고 '친구와 동업하고 싶다'를 적는 등 초등학생 수준의 답변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마저도 현재 아이가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아이는 이 기록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중학생, 고등학생 된 후 다른 활동을 하고 남긴 기록 역시 생각의 추이를 알려주는 소중한 데이터가 될 테고, 이는 진로를 설계할 때 용하다는 철학관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자기 이해와 직업 세계 이해를 위한 탐색의 시간을 갖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있다. 내가 클 때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부모의 결핍이 아이에게 투영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적절한 시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완료되었고, 함께 영상을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거우니 부작용 걱정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영상 속 사무실 간식으로 나온 젤리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아이와 훗날 젤리 간식을 주머니에 넣은 아이가 향할 일터가 어디인지 궁금한 엄마의 진로 탐색 여정은 느슨한 듯 촘촘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Photo by E.jpg Photo by Estée Jansse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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