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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3. 2021

영어 원서 읽기의 효과

마흔에 시작한 원서 읽기

|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

내가 말하는 "영어 잘하고 싶어"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만 조금 노력하고 영여를 잘하게 되는 기적이 나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어"의 줄임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기적을 만나는 횟수가 얼마나 될까. 그러니 내가 영어를 잘할 확률은 기적이 일어날 확률과 비슷하다.


이때 '최소한의 노력'에서 말하는 최소한이 어느 정도인지, '최대한의 결과'에서 말하는 최대한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도둑놈 심보 등급은 달라진다. 최솟값과 최댓값의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도둑놈 심보 등급도 아름다운 마블링을 가진 1++등급에 가까워진다.


나는 지금도 꾸준히 1+등급에서 1등급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때 1++등급의 강렬한 도둑놈 심보가 나를 휘감았던 적이 있다. 영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노력'값이 0이었고, 어이없게도 바라는 수준은 원어민이었던, 그래서 '최대한의 결과'값은 무한대에 가까웠던 때. 그때의 나는 초등(국민) 학교 5학년이었다.


| 친구야, the가 무슨 뜻이야? |

지금 40대는 중학교에 가서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영어를 배워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그때도 이미 사교육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런 내게는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서 몇 년간 살다가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읽었다.


당시 내 필통은 바른손 문구 세트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15cm 자에는 아주 예쁜 그림과 함께 영어 글귀가 적혀있었다. 'The'로 시작해서, 중간중간에 또 'the'가 나오는 그 글귀. 나는 그걸 볼 때마다 'the'의 의미가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뜻을 가진 단어이길래 이렇게 예쁜 그림 옆에 최고 빈도를 자랑하며 등장한단 말인가.


그 친구와 나는 꽤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the'를 물어보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며칠을 숙성시킨 용기는 "여기, 이 단어는 무슨 뜻이야?"를 입 밖으로 끌어냈고, 친구의 대답을 들은 나는 'the'에게 살짝 실망했다. 별 뜻도 없으면서 멋진 척하고 있었으니까. 'the'는 자기 혼자 착각해놓고 무슨 소리냐고 억울함을 토로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the'한테 실망했다.


그런데 별 뜻도 없는 주제에 'the'의 소리는 다소 오묘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던 그 친구는 혹시라도 내가 'the'를 '더'라고 발음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the'와 '더'의 차이를 열심히 설명했고, 친구의 설명에 발맞추어 열심히 따라 하던 나는 처음 만들어보는 소리에 신선함을 느꼈다. 'the'는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다. 나는 'the'에게 사과를 했다. 좀 전에 실망했다고 말한 건 잊어달라고.


그런 설명을 하는 친구가 멋져 보였다. 새로운 소리를 내는 글자가 가득한 영어책을 쉽게 읽는 모습도 멋져 보였다. 영어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친구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내던 소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했다. 뚝뚝 끊어지는 낱개의 단어가 아니라 완벽한 구성의 세트라면 더 멋질 것 같았다. 아무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라는 1++등급의 도둑놈 심보였던 것이다.


| 이렇게 이상한 모양의 계단은 처음 보는데 |

1++등급의 도둑놈 심보는 중학교 입학 이후 1+등급이 되어버렸다. 학교 영어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진 상태에서 그나마 수업을 받는 상태로 변하긴 했는데, 학교 수업이 그 친구와 같은 영어 실력을 갖는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실력을 갖추기 위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고, 일단은 성적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에 충실했다.


성적의 일부로서 영어는 다른 과목과 비슷한 수준으로 고등학교 진학, 대학교 진학에 도움을 주긴 했다. 수능이 끝나고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난 가도 되지?'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떠나긴 했지만 말이다. 20대의 나는 그 빈자리를 팝송 영어, EBS 영어방송 청취 등으로 채웠다. 영어 공부에 손을 놓아도 딱히 지장이 없는 음악 교사가 되어서도 말이다.


영어 실력은 계단식으로 향상되기 때문에 실력이 제자리인 것처럼 보이는 정체기를 잘 버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 계단의 모양새는 좀 이상했다. 계단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길다고나 할까. 좀처럼 다음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100살에 실력 향상의 점프 구간을 만나면 어쩌나 싶었다. 내가 100살까지 산다는 보장도 없는데.


| 외국 살이 없이도 그런 실력을 갖추다니, 내 딸이 부럽다 |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조기교육보다 적기교육에 신경 쓰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네댓 살 무렵의 아이에게 영어 DVD를 보여줬다. 그건 조기교육이 아니라 적기교육이었다. 영어 그림책과 DVD 덕분에 아이의 영어 계단은 내 것과 확연히 다른 모양새를 갖춰갔다. 어느새 내가 부러워했던 친구처럼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읽는 수준에 이르게 된 아이. 외국살이도 없이, 학원에 다니지도 않고 그런 능력을 갖게 되다니, 나도 내 딸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술 발전으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생략하고, 그냥 이 상태로라도 영어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영어책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아이가 다 읽고 던져놓은 영어책 중 아무 책이나 집어 들면 된다. 아이와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기 위해 아이가 읽는 책을 읽어보겠다는 마음은 이미 세팅되어 있다. 그중 일부를 영어책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 100살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다 |

그렇게 해서 아이도 읽고, 나도 읽은 영어책이 쌓여갔다. 언어 습득 능력에 있어서 아이와 성인은 큰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 실력도 조금씩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어 실력 향상의 점프 구간을 만나기 위해 100살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내 계단의 모양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100살 전에 몇 차례 더 점프할 수도 있다. 시작 시점이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점프할 공간이 충분하다. 더 올라갈 곳이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도둑놈 심보가 기본으로 깔려있긴 했지만, 중학교 입학 이후 영어 공부를 손에서 놓아본 적은 없다. 손가락만 살짝 걸고 있던 기간이 너무 길었고, 영어 공부가 아니라 영어 공부법에 대한 공부를 하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넓은 박람회장에 차려진 체험 부스를 5분씩 돌아가며 구경하는 식이었다. 그런 주제에 체험 시간도 여유롭게 갖지 않았다. 무지 바쁜 척하며 병아리 눈곱만큼의 시간만 허락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할 현대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비교적 덜 바쁜 시기에도 병아리 눈곱이 더 커질 수 없었던 이유는 보잘것없는 내 의지력 때문이었다.


최고로 효과적인 공부법을 찾아서 그렇게 헤매고 다닐 것이 아니었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해놓고 아랍어 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그 어떤 공부법을 쓰든 병아리 눈곱만큼의 시간만 투자하는 단계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안되던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원서 읽기였다. 


| 스토리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

사과를 먹지 않고 맨 정신(?)으로 누워서 왕자를 기다리는 백설공주의 귀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데, 이때 책장을 덮을 수 있는가.

여우를 잡기 위해 거침없이 파고드는 삽질과 그보다 더 빨리 땅굴을 파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여우 가족의 숨 막히는 추격전 중에 책장을 덮을 수 있는가. 

500켤레의 나이키 운동화와 살아있는 상어가 든 수족관을 가진 억만장자 소년이 평범한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책장을 덮을 수 있는가.


병아리 눈곱을 키워준 것은 스토리의 힘이었다. 누가 나에게 30분 동안 외워놓으라고 단어 리스트를 줬다면, 그는 이내 자기가 시킨 것이 '단어 외우기'인지, '냉장고 문 자주 열어보기'인지 헷갈리게 될 것이다. 나는 냉장고조차 놀랄 정도로 자주 냉장고 앞을 서성일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한 사람이다. 그런데 스토리 속에 던져진 나는 30분간 냉장고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순간 30분이 지나있게 만드는 힘이 스토리 속에 있었다. 평일에는 퇴근 후 30분이지만, 주말에는 30분이 아니라 3시간이 되기도 한다. 


학원을 보낼 것이 아니라면 아이가 읽을 책을 계속 공급해줘야 하는데, 그 책이 아이 손만 거치지 않고 내게도 왔다 간다면 도서 공급책으로서 내 업무에 대한 애정도 높아진다. 공부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재미있는 스토리 속에 들어갔다 나올 뿐인데,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읽는 일이 점점 수월해진다. 아이보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리고 학교 일과 집안일도 병행해야 하므로 아이가 열 권 읽을 동안 나는 고작 한 권을 읽기 때문에 나는 고를 수 있는 책의 범위도 넓다. 그리고 아이가 읽는 책을 나도 함께 읽음으로써 모녀간 대화 소재가 다양해진다.


아이가 어릴 때 엄마는 육체적으로 피로하다. 그 시기에 읽는 그림책은 그림을 읽어내는 여유가 있어야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피로한 육체로 그림까지 읽어낼 여유가 내겐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나와 같이 이상한 모양의 영어 계단을 가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꾸역꾸역 영어 그림책을 읽어줬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읽어주기도 했지만, 그림책의 좋은 점은 읽어주는 엄마와 상관없이 그림이 아이에게 설명을 해준다는 점이다. 이윽고 아이는 그림이 없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때쯤 나도 아이의 영어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다. 의무감으로 읽어주던 그림책 시기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아이가 읽는 책의 난이도를 못 따라갈 뻔했으니,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던가.


마흔? 나에게 마흔이란 원서 읽기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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