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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Apr 02. 2022

1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

| 이거, 애들 보는 책 맞아? |


 아마존 정글 탐험을 떠난다고 생각하며 Amazon Books에 들어간다. 열대 우림은커녕 동남아 여행 한번 다녀와본 적 없지만 초록색 정글 이미지 정도는 떠올려 볼 수 있다. 나무 덤불이 너무 빽빽해서 길을 잃기 쉬운 정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신기한 식물에 시선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곳. Amazon Books도 다를 바 없다. 끝없이 펼쳐진 책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눈길을 끄는 책을 만나곤 하니까.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도 그렇게 만난 책이었다. 저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알록달록 과일이 달린 멋진 나무가 있지 않을까 찾아 헤매던 길목에서 예상치 못한 버섯 군락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찾던 종류의 책은 아니었으나, 8~12세 대상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대놓고 진지한 제목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the Meaning of Life... 사, 삶의 의미? 코딱지의 의미가 아니고? '이거, 애들 보는 책 맞아?' 하며 다시 한번 대상 연령을 확인했다.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 (출처: Amazon Books)


 다시 확인해봐도 대상 연령은 8-12세. 그렇다면 내가 우리집 상황만 놓고 일반화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알고 보면 8-12세가 삶의 의미를 논하기에 아주 적절한 나이일지도 모르는데, 나만 그 사실을 몰랐던 걸까? 이런, 세상에는 나만 몰랐던 사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오늘은 나만 몰랐던 칠천팔백오십 번째 사실을 발견한 날이다. 그럼, 이제는 누군가 '삶의 의미'에 관한 책을 읽는 독자의 연령대를 상상해보라고 했을 때 당당히(?) 10살 안팎의 나이로 대답하는 나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집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과 삶의 의미를 논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어색하지만 그건 우리집 사정일 뿐, 다른 집에서는 들숨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철학적 논의가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흠, 우리집이라고 못할 건 또 뭔가? 기왕이면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도 함께 읽고 말이다. 좋다. 그림이 나왔다. 이 책을 읽고 삶의 의미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모녀가 보이는 그림. 아,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운 장면이여!



| 브라키오사우루스와 놀고 있던 6학년에게 |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큰 비중의 역할을 맡게 될 어린이를 불러서 나의 원대한 포부를 밝혀야 했다. 우리는 이제 곧 삶의 의미를 논하는 사이가 될 거라고.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집 6학년 어린이는 브라키오사우루스 피규어 목에 리본을 묶고 있었다. 응? 브라키오사우루스? 5살 무렵에 사준 그 공룡 피규어 10종 중 브라키오사우루스? 


 누군가 삶의 의미를 논할 상대로 가장 적합한 이를 꼽으라고 한다면, 브라키오사우루스 피규어 목에 리본을 묶는 6학년이라고 대답하자. 공룡은 2억 5천만 년 전에 등장하여 육상을 거닐었던 가장 거대한 동물군이었으나 지금은 지구 상에서 자취를 감춘 존재로서, 생生과 사死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아, 그만 하자. 이런다고 '쟤랑 정말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며 자꾸만 피어오르는 의구심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일단 책 표지를 보여줬다. 열쇠 9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림의 표지가 아이 취향일 리는 없겠지만, 용기를 내서 말을 꺼내보았다. 거절당할 확률을 줄이기 위해 먹을 것을 미끼로 걸면서 말이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 책 이야기 한번 해볼래?" 

 "맛있는 거? 뭐? 뭐 먹을 건데?"


 역시,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었다. 맛있는 게 뭔지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치밀함을 보였다. 


"으... 응? 맛있는 거... 는 많지. 그중에서 뭘 먹을지는... 이야기하는 날 정할까? 이야기하려면 책부터 읽어야 하거든. 어때? 이 책 재밌다던데, 읽어볼래?"


 아이는 구체적인 메뉴를 밝히지 않는 엄마가 지난번처럼 '삼색나물 비빔밥', '가지 무침' 따위를 맛있는 거라고 내놓을까 봐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책을 들고 소파에 앉긴 했다.



| 13살이 되는 생일날, 이 박스를 열어보렴  |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에는 뚜껑에 the Meaning of Life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무 박스가 등장한다. 동봉된 편지에는 13살이 되는 생일날에 이 박스를 열어보라는 말이 있고, 주인공 Jeremy는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박스를 열 수 있는 열쇠가 없다면? Jeremy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친구에게 이 박스를 맡기며 5년간 보관해두었다가 Jeremy에게 전해달라고 했는데 그만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삶의 의미'라니. 그것도 13살에 열어보라고 한 내용이라니. 만 11세이긴 하나 한국 나이 13살을 키우고 있는 엄마인 나도 궁금할 내용이 아닌가. 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고 말할 수 있는 영어 실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가 읽는 원서를 나도 함께 읽으면서 내 리딩 실력이 늘긴 했지만, 나의 원서 읽기 속도는 애가 읽는 속도의 1/10에도 못 미친다. 저녁 설거지 후 몇 페이지 읽고, 애 숙제 조금 봐준 뒤 몇 페이지 읽고, 잠들기 전 몇 페이지 읽고... 3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이 속도로 읽고 있으려니,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 책을 소재로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하기'라는 야망 실현이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이 더 걸릴지, 한 달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는 완독. 마음이 시들해지기 전에 앞선 단계를 추가해보면 어떨까. 책은 아직 덜 읽었지만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활동이 첫 번째 챕터를 다 읽기 전부터 이미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 1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


 Jeremy의 아버지가 5년 뒤의 아들에게 보낼 메시지를 나무 박스에 보관했다면, 나는 우리반 아이들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때 받게 될 편지를 교무실 캐비닛에 보관했던 적이 있다. 3월 첫 만남에서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의미를 겸해서 '1년 뒤의 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게 하고, 1년 뒤 종업식날 그 편지를 나누어주는 식이었다. 우리반 아이들과 했던 활동을 딸아이와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Jeremy 아버지의 나무 박스 덕분이었다.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자물쇠', '보관함' 등의 검색어를 넣어보기 시작했다.


자물쇠가 달린 미니 보관함을 장만했다. 1년 뒤의 자신에게 보낼 메시지를 보관할 용도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1년 뒤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2023년 딸아이 생일날, 이 보관함을 개봉하여 오늘 썼던 편지를 읽기로 약속했다. 


 교실에서 '1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활동을 하며 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다. 미래의 내가 궁금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된다고. 지금 내 모습이 쌓이고 쌓여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창가 쪽 세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눈썹 짙은 여학생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딸아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그 학생과 같은 진지함을 보여줄... 잠깐, 벌써 편지 쓰기를 시작한 아이가 너무 싱글싱글 웃고 있다. 이게 그렇게 웃어가며 쓸 편지인가? 뭔가 이상하다.


 "너, 방금 편지지에 뭐 쓴 거야? '우헤헤헤헤'라고 쓴 거야?"


 그래, 교실에서 가장 반듯한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우헤헤헤헤'를 쓰든, '우히히히히'를 쓰든 간섭하면 안 된다. 심호흡을 하자. 후... 후.....


 "엄마! 내가 쓰는 편지 보지 말고, 빨리 엄마 편지 써."


 아, 맞다. 내 앞에도 편지지가 놓여 있다. 



| 머랭 쿠키와 삼색나물 비빔밥 |


 가지 무침이 있을 리가 없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진열장에서 프레첼을 품은 머랭 쿠키를 본 순간, 딸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편지의 초반부를 장식할 '우헤헤헤헤'는 이미 그 순간부터 잉태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급식 시간, 나물 반찬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넉넉한 양의 시금치가 배식 집게에 집혀 올라오면 마치 초록 벌레를 본 것 마냥 화들짝 놀라는 아이도 있다. 반면, 수북하게 받은 나물 반찬을 고기 반찬보다 맛있게 먹은 뒤 후식으로 나온 마카롱은 너무 달다며 한 입만 먹고 남기는 아이도 있다. 이런 중학생이 드물긴 하지만 이 세상에 없는 존재는 아니다. 


 후식으로 나온 마카롱을 한 입만 먹고 남길 리가 없는 딸아이는 나물 반찬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물 반찬이 밥 위에 올려진 삼색나물 비빔밥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나열한 뒤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이거 건강식 리스트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다. 이맘때 애들은 다 그런 법이라고 말하기엔, 이미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봐버렸다. 창가 쪽 세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눈썹 짙은 여학생을 보고 나면  8-12세가 삶의 의미를 논하기 좋은 나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도 힘이 실린다. 아, 딸아이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근무해온 학교에서 엄마 마음에 들었던 학생들과 알게 모르게 비교당했을지도 모른다. 안다고 다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그래 왔던 것 같다. 혹시 1년 뒤의 내가 근무교의 최고 모범생과 내 아이를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어쩌나? 자, 빨리 쓰자. 1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에. 그렇게 살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고 쓰자. 지금 머랭 쿠키도 함께 응원하고 있다고 쓰자. 머랭 쿠키는 이런 응원보다 브로콜리 뺨칠 정도의 영양을 갖추는 쪽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지만, 달기만 한 주제에 지금 딸아이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일등공신이므로 차마 미워할 수는 없다고 쓰자.


 내 편지에 집중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아이의 표정을 보니, 아이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편지 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쪽지 시험을 칠 때 짝이 커닝하지 못하도록 팔로 시험지를 가리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서 말이다. 칫! 나는 네 편지 커닝 안 해도 되거든! ... 하는 생각이었지만 어떤 내용을 썼는지 궁금했다.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엄포에 깔끔하게 포기하긴 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보이는 아이의 이마가 귀엽다. 저 머릿속에는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까. 


 사랑하면 알고 싶은 법이지만, 알고 싶은 그 마음만 모조리 다 꺼내놓는 것은 중학생을 사랑하기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상대에게 신비한 변화로 가득 찬 생각 타래를 펼쳐 보이는 건, 아무래도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엄마가 쓴 편지에는 뻔한 이야기만 있을 거라는 생각이라면, 나 혼자 아이 편지의 내용이 궁금해서 안달복달하게 된다. 이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미지의 스토리를 탐하는 자라면 적어도 비등한 수준에서 꺼내놓을 생각 자락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이가 엄마 생각을 조금이라도 궁금해한다면, 나 혼자 안달복달하는 꼴은 면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호시탐탐 읽을거리를 겨냥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내 머릿속에서 나올 생각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게 항상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서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 완독을 하기도 전에 편지 쓰기부터 해 버리긴 했지만, 조금씩이라도 읽는 게 안 읽는 상태보다 더 낫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같이 편지를 쓰고 나니, Jeremy Fink and the Meaning of Life의 뒷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완독을 향해 달릴 에너지가 가득 채워졌다. Jeremy 아버지가 남긴 메시지는 무엇일지, Jeremy는 어떤 방법으로 그 박스를 열게 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2023년의 우리가 오늘 쓴 편지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더욱더 궁금하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편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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