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결과의 향방을 가르는 요소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존재가치
1.
의료분쟁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1) 사적합의, 2) 행정기관에 의한 공적합의(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한국소비자원), 3) 법원에 의한 소송절차 등이 있다. 이 중 법원에 의한 소송절차(소위 '의료소송')의 경우, 경험상 1심에서만 평균적으로 1년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적지 않은 매몰비용(변호사보수, 인지대 및 송달료, 감정료 : 약 800만원 가량)이 소요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소송절차를 최선의 의료분쟁 해결방법이라 말하기는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 역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이를테면, 의료기관의 법적책임이 인정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분쟁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경우) 의료분쟁 상담을 구하는 의뢰인들에게 소송절차부터 권유하지는 않으며, 우선 의료사고에 따른 법적책임 발생 여부에 대한 검토(의료상의 과실 여부, 청구가능한 손해배상액 산정 등)를 수행한 뒤, 의료기관과의 합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사적 합의절차를 진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2.
다만, 이러한 사적합의절차로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 고려해야 할 것은 행정기관에 의한 공적합의(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이하 '중재원'이라 함) 절차인 바, 중재원의 조정절차의 장점은 저렴한 비용으로 비교적 단기간(신청서 접수일로부터 약 6개월 이내) 내에 분쟁처리결과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며, 단점은 소송절차에 비하여 인정되는 손해배상금의 규모가 전반적으로 작다는 점과 의료기관 측에서 조정절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조정절차가 개시될 수 없다는 점(다만, 사망, 1개월 이상의 의식불명 또는 중증 장애가 발생한 경우는 예외) 등이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재원의 조정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고려할 수 있는 분쟁해결절차는 법원에 의한 소송절차인 바, 앞서 살핀 소송기간 및 소송비용에 따른 부담을 고려하건대, 굳이 중재원의 조정절차를 건너뛰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할 것이므로, 반드시 소송절차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의료분쟁 실무를 처리하는 변호사 입장에서 중재원 조정절차의 가장 큰 장점으로 느끼는 것은 환자측에서 큰 비용부담 없이 해당 의료사고의 법적책임 유무를 확인받아볼 수 있는 테스트베드(Test bed)로서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료분쟁실무를 처리하는 변호사 입장에서 보자면, 의료분쟁결과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사건처리 담당자의 [사실관계 정리능력(치료내역, 임상적 경과 등)]과 [법적쟁점 추출(legal issues extraction)능력]이라고 본다.
의학적 사실관계는 진료기록을 통해 확인하고 입증하는 것으로서 사실관계 정리능력은 당연히 의학적 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법적쟁점 추출능력은 법률지식과 의학지식이 충분한 수준으로 융합되어야 갖출 수 있다 할 것인바, 분쟁당사자 입장에서 두 능력을 모두 갖춘 조력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분쟁당사자는 의료분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률사무소에 방문하여 법률상담 또는 검토의견을 전달받아 분쟁을 처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법률상담에는 소정의 비용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일회적인 법률자문만으로는 계속적인 분쟁처리절차(조정, 소송 등)를 수행하기는 어렵기에 결국 적지 않은 금액의 수임료를 지불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기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중재원의 조정절차에는 상당한 이점이 있는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4.
중재원 내에는 개별 당사자의 진술과 진료기록을 통해 진료경위와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법적쟁점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조사관들이 있으며, 각 조사관들은 대부분 간호사 자격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시간동안 임상현장 경험을 갖춘 의료인들로서 우수한 [사실관계 정리능력]을 갖추고 있다(비록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조사관 1인당 연간 사건처리 건수에 비추어 볼 때 중재원의 조사관들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분쟁 사실관계 정리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앞으로 이러한 능력을 갖추게 될 인력들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내가 2018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3년째 중재원의 비상임감정위원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사관들이 중요한 의학적 사실관계를 놓친 경우는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다만 조사관은 의료인이므로 [법적쟁점 추출능력]에 일부 공백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개별 감정위원회의 법률가 감정위원(일반적으로 변호사)들의 감정소견서 등을 통해 보완이 가능하다 할 것이며, 향후 개별 분쟁처리 경험이 누적될 수록 조사관들의 법적쟁점 추출능력 역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5.
중재원 조정절차의 또 다른 장점은 별도의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서도 위와 같은 조사관들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감정위원으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개별 분쟁당사자의 조정신청서의 내용이 매우 개괄적이고 두리뭉실 함에도 불구하고 개별 조사관들이 해당 분쟁의 의학적 사실관계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함에 따라 분쟁해결에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법률사무소에 유상으로 사건을 의뢰하더라도 확보하기 어려운 수준의 자료도 적지 않았다(의료전문변호사로 홍보하는 것과 실제 의료분쟁처리능력이 어떠한지 여부는 매우 다른 문제다).
6.
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할 지 여부를 고민하는 당사자의 경우, 대부분 과연 중재원의 조정절차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인지 여부 또는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여 불명확하게 분쟁이 처리되는 것은 아닐지 여부에 대한 의혹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재원의 설립목적이 일도양단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당사자가 합리적 수준에서 상호 양보함으로써 조정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환자측이 소송절차와 비교할 때 가장 높은 수준의 손해배상을 지급받을 수 있는 절차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중재원의 조정절차는 변호사의 조력 없이도 상당한 수준의 [사실관계 정리]와 [법적쟁점 추출]이 가능한 절차라 할 것인바, 비용대비 효율성에 비추어볼 때 이보다 더 합리적인 절차를 찾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재원의 조정결과를 수긍할 수 없다면, 그 때는 조정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 할 것이며, 이 경우 비교적 잘 정리된 중재원의 감정서 등을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와 법적쟁점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소송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더 효율적으로 변론에 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7.
근래 적지 않은 의뢰인들께서 사무실에 내방하여 의료분쟁에 관한 법률상담을 받고 가시는데, 위와 같은 분쟁처리방법의 우선순위에 따라 대부분의 의뢰인에게 사적합의 또는 중재원의 조정절차를 선행해 볼 것을 권하다보니 소송사건 수임률이 상당히 떨어져서 현재 법인 재정상태가 상당히 악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건대 의료분쟁의 처리에 관하여는 비용-효율적 측면에서 소송절차보다 선행해볼 가치가 있는 절차가 있기에 앞으로도 소송절차를 우선적으로 권유할 생각은 없다(법인 재정상태는 뭐....어떻게든 되겠지). 아울러 비공식적으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웃나라인 일본 역시 이와 같은 의료분쟁처리기관(행정기관)이 존재하며,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의료분쟁의 상당량을 처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의료분쟁처리기관의 역할 확대는 하나의 사법적 경향(judicial tendency)으로 볼 여지도 있다.
아무쪼록 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할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일단 과감하게 조정신청을 해보는 것을 권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분쟁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니 이용해서 나쁠 것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