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담하지 말자. 때로는 합의서의 효력이 부정될 수도 있다.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후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의료기관과 환자는 서로 합의절차를 거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경우 의료기관에서는 분쟁처리 담당자(클레임 담당자 또는 코디네이터)를 통하여 환자를 응대하게 되며,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사망, 사지마비 등)가 발생한 경우가 아닌 이상 1000만원 미만의 범위 내에서 치료비를 면제해주거나 소정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내용으로 합의가 종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합의서 말미에 "환자는 본 사건에 관하여 일체의 민, 형사상의 권리를 포기한다." 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환자는 일단 합의서에 날인을 한 뒤로는 더 이상 의료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민사소송)을 제기하거나, 담당 의료인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형사고소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합의서 작성 후 수 년(또는 수 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합의서 작성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후유증이 발생한 경우이다. 특히 일단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의료기관에서는 향후 증상의 악화가능성을 최소화하여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인지상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사례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료사고 발생 후 합의서를 작성하였으나, 추후 합의서 작성 당시에는 예견할 수 없었던 후유증상이 발생한 경우, 환자는 더 이상 의료기관에게 아무런 손해배상청구도 할 수 없을까?
우리 대법원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판시한 바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피해자가 일정한 금액을 지급받고 그 나머지 청구를 포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진 때에는 그 후 그 이상의 손해가 발생하였다 하여 다시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그 합의가 손해발생의 원인인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손해의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후발손해가 합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예상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당사자가 후발손해를 예상하였더라면 사회통념상 그 합의금액으로는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당할 만큼 그 손해가 중대한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의사가 이러한 손해에 대해서까지 그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다시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00. 3. 23. 선고 99다63176 판결 참조).
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합의서를 작성한 경우라 하더라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
1) 그 합의가 손해발생의 원인인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손해의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을 것
2) 후발손해가 합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예상이 불가능하였을 것
3) 당사자가 후발손해를 예상하였더라면 사회통념상 그 합의금액으로는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당할 만큼 그 손해가 중대할 것
따라서 만일 의료사고의 피해자가 의료사고 발생 후 2~3개월 정도밖에 경과되지 않아 해당 증상의 악화 가능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의료기관 분쟁처리 담당자의 설명만을 듣고 소액의 위로금만을 받은 뒤 합의서를 작성하였으나, 추후 증상이 악화되어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사지마비, 운동장해, 감각이상 등)이 발생한 경우라면, 환자는 여전히 소송 등을 통하여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합의서 효력이 제한되는 경우는 위 3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합의서를 작성하기 전에 충분히 심사숙고함으로써 손해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합의서 때문에 아무에게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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