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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석변호사 Nov 08. 2018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영화 [박화영]을 보고


근래 유튜브 스트리머(고몽)를 통해 알게된 다양성(diversity)영화 "박화영"을 감상했다.


아직 고등학생 나이인 박화영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 줄곧 삭막한 방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함께 지낼만한 가족은 없으며 그나마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동료는 가출팸 패거리 뿐. 패거리들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며 박화영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박화영을 노예처럼 부린다. 친구인지 폭군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은 박화영에게 가혹한 폭행과 악행을 일삼는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화영이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가장 아끼는 친구(과연 친구일까?)인 미정을 위해서는 온몸을 불사르는 행태까지 보인다. 결국 박화영은 미정과 패거리들의 살인범행에 대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면서 그들과의 인연은 강제로 단절된다. 그러나 박화영은 출소 후에도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다른 패거리와 함께 지내며, 줄곧 가출팸 패거리에게 하던 말을 또 다시 내뱉는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뻔 봤냐"


이 영화 속에 포함된 거친 언어와 폭력성에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개별 장면의 폭력성보다는 박화영의 내면상태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다(변호사 업무를 하다보면 영화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어서 그런지,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박화영은 패거리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용당하며 핍박을 받는데 실컷 이용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한 후에는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뻔 봤냐?"며 웃음을 보인다. 박화영은 집단의 요구가 정당한 것인지 여부를 떠나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박화영은 결국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욕구에 대한 객체가 됨으로써 존재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인데, 역설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선택한 그 행위(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가 오히려 시간이 갈 수록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자기모순적인 행위가 반복되는 문제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부모로부터 차갑게 버림받았던 과거에 도달하게 된다. 박화영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채 무의미한 현실속에 부유하였다. 그러던 중 패거리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패거리에 소속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끈이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극단적 고독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화영은 끊임없이 패거리들에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요구한다. 패거리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화를 내지만, '엄마'라는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또 다시 객체화하는 행태를 반복한다.





이와 같이 영화 박화영은 비록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과 인물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감지해 볼 수 있기에 그저 픽션으로 취급하고 넘길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욕구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자아의 정체성'과의 관계를 살펴보게 되는데, 사람의 정신(mental)을 지탱하는 힘은 '자아의 정체성'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비록 정체성을 수립하는 것은 본인이라 하더라도,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타인의 의식을 이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테면, 내가 나를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정체성이 흔들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긍정적 자아를 증명받고 싶어하고, 이러한 기제는 결국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래에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타인과의 관계가 점차 사이버(cyber)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지 여부는 "좋아요(like)"의 수(amount)로 가시화되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SNS에 대한 팔로워 기타 관심도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을 비꼬아 이른바 "좋아요충", "따봉충"이라 비하하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같은 이면을 들여다보면 "좋아요"에 집중하는 것은 자신의 긍정적 자아를 검증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비하하거나 폄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근래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SNS 매체가 대부분 시각적 매체(사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하는 방법이 시각적, 피상적인 수단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람의 가치는 시각적인 것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100자가 채 되지 않은 짧은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영역도 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는 대부분 이러한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세계적인 물리학자라 하더라도 인스타그램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오늘 저녁에 먹었던 스테이크 사진이나 육덕진 복근사진을 업로드 해야 하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러한 이유로 모바일 환경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다고 평가되는 인스타그램에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하는데 지나치게  몰입하는 태도 또는 인스타그램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좌절하는 태도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와 같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열악한 환경에서 발현되면, 그 욕구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라면, 버림받기 싫은 욕구는 더 불행해지지 않고자 하는 기제라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혐오'를 얻게된다면, 그나마 갖고 있던 긍정적 자아 조차 모두 파괴되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잃게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부정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결과를 유발한다 할 것이며,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와 같이 부정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에대한 본능적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박화영이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패거리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집착했던 것은,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한민국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박화영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모순.


영화 박화영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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