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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석변호사 Jan 22. 2020

환자편에 설 것인가, 의료인편에 설 것인가

변호사 8년간의 발자취...그리고 결정



환자편에 설 것인가, 의료인편에 설 것인가?



 변호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참으로 유치한 질문일 수밖에 없음에도 변호사가 된 지 만 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적잖이 받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변호사는 의뢰인의 억울한 사정을 수집하고 그 억울한 사정을 사법적 권리로 환원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인바, 환자-의료인간 분쟁이 발생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의료인은 가해자, 환자는 피해자"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없을 뿐더러, 변호사가 임의로 어느 한쪽 집단을 선택한 뒤 그 입장만을 대변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직후에는 [환자-의료인]의 관계를 [다윗-골리앗]의 관계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나의 지식과 경험이 상대적 약자인 환자측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특히 의료지식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인바, 의학지식의 편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의료분쟁을 일견 [다윗-골리앗]의 관계로 볼 여지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의료소송 사건을 수행하기 시작한 이래 의료인과 대등한 지식수준으로 의료소송을 수행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초의학지식과 의료분쟁에 주로 인용되는 임상지식을 학습해왔다. 그 결과 이제는 의료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 진료기록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문제된 의료행위에 관하여 임상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시야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도 많은 발전과정이 있었는데 그 동안 의료소송을 수행했던 기억들 중 문득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개업 이후 최초로 수임했던 정형외과 의료소송(tendon graft 이후 '단추구멍변형'이 발생했던 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모교인 고려대학교 의학도서관에 방문하여 관련 도서들을 열람하고 열심히 복사해서 법원에 제출했던 기억(다른 대학교 의학도서관에는 출입이 불가능해서 안암동까지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 내과 관련 의료소송을 수행하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전공의 선생님으로부터 해리슨 내과학을 중고로 구입하고 20만원에 가까운 책값의 송금버튼을 누르며 손이 부들거렸던 기억(이때는 개업 초기라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점심식사를 위해 사무실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한솥도시락까지 걸어가서 끼니를 때웠던 시절이었음).


- 진료기록에 기재된 수 많은 약어들과 의학용어들을 해석하느라 응급실초진기록 한페이지 분석에만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던 기억.


- 급성뇌경색 증상이 MRI 영상에서 어떻게 표시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글검색을 통해 뇌경색 환자의 MRI 영상자료들을 뒤져봤던 기억.


- 급성뇌경색 환자에게 DWI-MRI 진단 없이 일반 CT 촬영 후 환자를 퇴원시킴에 따라 뇌경색 후유증이 발생했던 사안에서 진단상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국회도서관에 방문하여 하루 종일 관련 논문들을 샅샅이 뒤져보았던 기억


- 양악수술의 수술절차가 궁금하다는 재판부를 위해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는 양악수술 프로세스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본 후 관련 교과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재판부 앞에서 관련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기억


- 의료소송 경험이 누적되면서 해부학 지식 없이는 도저히 올바른 변론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지방재판에 출정할 때마다 무거운 grey's anatomy 책을 들고다니며 짬짬이 해부학 공부를 했던 기억


- 추간판 감염사건에서 감염경로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무혈성조직에 대한 척추외과학 교과서 내용을 확인한 뒤 그 교과서를 구입하여 재판부를 설득했던 기억


- 심전도(EKG) 판독의 적절성이 문제가 된 사안에서 이를 검토하기 위해 심전도 교과서를 구입한 뒤 이틀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음에도 결국 포기하고 감정결과에 기댈 수밖에 없어 아쉬웠던 기억(심전도는 너무 어렵다)


- 양악수술 후 심각한 수준의 악결과(numbness + synkinesis)가 발생한 사안에서 다른 법률사무소를 통해 1심 사건을 진행한 뒤 패소했던 당사자가 나에게 항소심 사건을 의뢰한 사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관련 수술기록 중 대량의 출혈 발생사실과 이에 따라 상당한 수혈이 진행되었던 내용을 확인함에 따라 재판부를 설득하여 재판결과를 뒤집었던 기억(꽤 보람있었던 기억이다)





 변호사로서의 미래와 비전에 대한 복잡하고 계산적인 생각에 매몰되는 것보다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문가로서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고 만 8년의 시간동안 의료분쟁을 처리해왔다. 그러다보니 그간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노력하여 떠올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각이 잘 되지 않는다. 다만, 의료소송을 취급하는 현재의 내 모습을 관조하자면, 이와 같은 순간순간의 노력과 시간들이 있었기에 적어도 내가 한 사람의 변호사로서 의뢰인에게 올바른 지식과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여전히 가야할 길은 한 없이 멀지만).




 2019년 초에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비상임감정위원으로 선임이 된 이래 매월 5~6건 정도의 의료분쟁 감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감정부는 일반적으로 [상임감정위원 + 의료인 감정위원 + 법조인 감정위원 + 소비자 감정위원]들로 구성되며 상호 의견교류를 통해 합의된 내용을 감정서로 정리한다.


 감정위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것 중 가장 큰 부분은, 의료지식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의료기관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다. 환자들은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의료기관의 과실을 지적하며 분쟁처리기관에 클레임을 제기하지만, 의료기관은 임상적인 수준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기술의 한계 또는 환자의 기왕증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 이상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일 뿐 법적 책임을 부담해야할 정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경우가 많았는데, 어찌보면 의학지식의 편중이 오히려 의료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라 할만하다(만일 환자가 충분한 의학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해당 악결과는 불가피한 합병증이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을테니).


 나아가 이러한 상황은 고령의 환자가 수술 후 합병증이 발생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 더 과격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족들은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머지 본능적으로 그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색출해내는 심리적 작용이 개시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가장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상대방이 그 수술을 집도하였던 의료인이다 보니 고인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의료인에게 돌리려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때로는 우리 모두 '죽음'을 더 성숙한 자세로 마주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만일 환자측이 의료소송을 제기하고자 하였다면 사전에 법률사무소에 방문하여 승소가능성에 대한 법률자문을 받을 것인바, 이 과정에서 의료인에게 책임을 부과시키기 어렵다는 의견을 전달받았다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의료분쟁의 시작이 차단되는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그에 비하여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조정절차는 변호사를 선임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일단 관련 자료를 취합한 뒤 비교적 간단한 조정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조정절차가 개시될 수 있기에, 때로는 과도한 수준으로 합리성을 잃은 조정신청이 제기됨에 따라 의료기관들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이른바 '신해철법'에 의하여 환자가 사망하거나 중증의 장애가 발생한 경우에는 의료기관이 조정절차에 불응할 수 없게 되었기에 이러한 문제가 더 확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의료기관이 이와 같이 과도하게 합리성을 잃은 조정신청 등에 의하여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지 않는다면, 이로 인한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보완 또는 시정의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의료기관에는 언제나 건강의 위험성이 있는 환자들이 방문하여 침습적 치료를 받게 되는바, 의료인들이 의료기관 내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악결과(불가피한 합병증)에 대하여 일일히 법적대응을 해야 한다면, 본업인 진료업무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다툼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상 보건의료정책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 의료분쟁에 관한 정책이 의료기관을 억제하고 견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구조적 위험성(의료기관이 의료분쟁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의료서비스의 질이 저하되는 위험성)은 더 가속화될 것으로 생각되는바, 이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올해부터는 환자들의 권익을 실현하는 업무는 더 훌륭한 변호사님들께서 수행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는 의료인들이 부당한 법적제재 또는 클레임으로부터 적절한 법적 보호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조력함으로써 의료인들이 본업인 의료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할 생각이다(현재까지 수임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여 의뢰인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부디 이러한 결정이 환자-의료인 관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도 사회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결정이기를 바랄 따름이다.




관련 문의 : 정현석 변호사 (법무법인 다우)

연락처 : 02-784-9000

이메일 : resonancela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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