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직도 오래된 장면을 떠올린다. 야음을 틈탄 침투, 위조된 신분증, 은밀한 접선과 암호문. 그러나 2025년의 간첩은 국경을 넘지 않는다. 군사분계선을 건너지 않고, 총이나 폭탄도 들지 않는다. 대신 텔레그램 계정 하나와 가상화폐 지갑 주소 하나만 있으면 된다.
최근 대법원이 확정한 사건은 이 변화가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북한 해커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약 9억 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받고, 현역 장교에게 접근해 군사기밀을 빼돌린 가상화폐 거래소 대표. 그에게 내려진 형은 징역 4년이었다. 그리고 군사기밀을 직접 넘긴 육군 대위는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나 일회성 범죄가 아니다. 전쟁의 방식이 이미 바뀌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안보 인식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사건의 시작은 총성이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2016년, 북한 해커로 알려진 ‘보리스’라는 텔레그램 계정과의 접촉이 모든 출발점이었다. 그는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커부대인 ‘110호 연구소’ 공작원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후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가상화폐 거래, 익명 메신저를 통한 연락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도, 이념도, 충성이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거래만 있었다. 돈을 주고 정보를 사고, 정보를 넘기는 구조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연결 고리의 중심에 민간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상화폐 거래소 대표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전통적인 간첩도, 군 내부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기술과 돈, 그리고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중개자였다. 현대의 간첩 활동은 더 이상 국가 대 국가의 대결이 아니라 플랫폼과 플랫폼 사이,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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