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의 불, 가장 따뜻했던 시절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익숙했죠. 그게 그냥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참 아팠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의 공기, 분위기,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할아버지가 떠난 뒤로 우리 집은 더 조용해지고, 쓸쓸해졌어요.
제가 다닌 학교는 시골 학교였는데, 그때는 선배들이 불량 서클을 만들어서 후배들을 강제로 끌어들이곤 했어요. ‘야생마’, ‘고인돌’ 같은 이상한 이름을 붙여놓고 말이죠.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야! 너희 서클 가입해!” 하면서 끌고 갔어요. 거부하면 무조건 맞았거든요.
그냥 맞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선배들은 소주 대병 하나 놓고 새우깡 한 봉지를 시켜놓고는 거리를 정해요. 그리고 “요이땅!” 하고 뛰게 시켜요. 1등만 안 맞고, 나머지는 무조건 맞았어요. 얼굴을 피하려고 했지만, 가슴팍을 주먹으로 그렇게 때렸어요. 저는 너무 많이 맞아서 피까지 토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느꼈던 억울함과 두려움이 아직도 잊히질 않아요.
솔직히 저는 큰 꿈이 없었어요. 그냥 ‘부모님께 손 벌리지 말자’ 그 생각 하나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면허를 땄어요. 스물한 살쯤에요.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준비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에요. 지금이야 시골에도 보일러 시설이 잘 돼 있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부뚜막에 불을 때고, 가마솥에 밥을 지었어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꽃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밥 짓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요. 이상하게도, 힘들었던 그 시절 중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참 예뻐하셨어요. 겨울이면 농사일도 없고, 눈이 소복이 쌓였죠. 강원도의 겨울은 길고 또 참 추웠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곤 했어요. 토끼를 잡고, 꿩을 잡아서 불에 구워 먹으면서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나요. 먹을 게 많아서 행복했던 게 아니라, 그 순간이 따뜻했기 때문이겠죠.
어린 시절은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소박한 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나는 술을 많이 마셨어요.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30대 초반에 정말 큰일을 겪었어요. 말하고 싶지 않은… 아니,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그 일을 겪고 나니까, 그냥 버티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술을 찾았어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남자라면 극복해야지.“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근데 저는 안 되더라고요.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아니면 그냥 변명일까? 그래도 안 되더라고요.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다시 무너지고, 다시 술을 찾게 되고… 그런 날들이 계속됐어요.
한 잔, 두 잔… 셀 수도 없이 마셨어요. 술을 마시면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어요.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데 아침이 오면, 현실은 그대로였어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여전히 거기 그대로 서 있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로.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지내요. 특별히 뭘 하겠다는 것도 없고, 그냥 시간이 흘러가요. 밖에 나가면 술을 마시게 되고, 그러니까 거의 방에 갇혀 있는 거랑 다름없어요. 방에서 나오면 결국 술자리에 끌려가고, 아니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고… TV 보거나,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고, 유튜브 보면서 시간 보내고… 가끔 가족들한테 연락하고요. 그냥 그렇게 지내요.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정말 많아요. 열 손가락으로도 다 못 셀 정도예요. 복지사님들도 저를 챙겨주시고, 통장님도 계시고, 주위 형들도 많고… 다들 저한테 잘해 주세요. 그런 점에서는 참 감사해요.
근데 고민이 되는 게 있어요. 이제 나도 일을 해야 하잖아요. 일단 나름대로 알아보고 있긴 한데…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쉬었으니까, 적응할 수 있을지 겁이 나요.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 보니까, 다시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막막하고 두려워요.
결국 이건 내가 극복해야 할 숙제겠죠.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내가 노력을 크게 안 했어요. 이게 다 내 핑계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겁이 나요.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아요. 재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지금 아버지는 혼자 계세요. 저는 지금이라도 내려가면 되는데… 용기가 안 나요. "올해는 꼭 가야지." 매년 그렇게 생각하는데, 결국 못 가요. 가족 얼굴 보는 건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게 더 겁나요.
고모, 작은아버지, 사촌 형제들… 다들 저를 이해 못 할 거예요. 이미 뒷말도 많을 거고요.
"쟤는 왜 저래?"
"도대체 뭐 하고 사는 거야?"
그런 말들. 사실 그게 너무 무서워요.
지금 짓고 있는 임대주택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 중인데… 안 들어가려고 해요. 거기 들어가면 결국 똑같은 삶을 살 것 같아서. 지금 마음은 거의 7대3으로 "안 들어간다" 쪽이에요.
그래도 가족이 있다는 거, 그게 제 삶의 의미예요.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형도 있고, 누나도 있어요. 그게 저한테는 가장 큰 가치예요.
솔직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