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곳이 이름이 되었을 때
한 평 남짓한 작은방에서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을 우리는 쪽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저 쪽방주민이라 한다.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불려 왔다.
그 이름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붙여진 것도 아니고, 누군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불려 왔을 뿐이다.
쪽방주민이라는 말은 설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부르기 위한 이름에 가깝다. 어디에 사는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까지는 더 묻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말이다.
어느 날처럼 후원품을 들고 쪽방에 방문한다. 문을 두드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쪽방주민을 만난다.
익숙한 인사, 익숙한 표정, 익숙한 방 안의 풍경. 좁은 공간에 놓인 물건들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사람도 늘 그 자리에 있다.
후원품에는 이런 글씨가 써져 있다.
'쪽방주민을 위한 생활용품 지원'
그 문구는 특별하지 않다. 너무 익숙해서, 더는 의문을 품지 않게 되는 문장이다. 나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상자를 들고 쪽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쪽방주민에게 전달한다.
상자와 함께 짧은 응원의 메시지도 전달한다.
"OO기업에서 쪽방 주민분들을 위해서 키트를 만들어 주셨어요. 잘 받아주세요."
대뜸 어느 쪽방주민이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사실 여기가 쪽방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어. 그저 방값 싸고 하루 누울 곳이 필요해서 왔는데, 니들이 계속 쪽방주민이라고 하니까 쪽방주민이 된 거야."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쪽방주민이라 부르지 않았다. 다만 값싸고,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잠자리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했다.
쪽방주민이라는 말은 정체성이 아니라 호칭으로 먼저 도착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설명되지 않았고, 대신 공간이 가진 이름이 사람을 대신했다.
쪽방주민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사람의 얼굴을 지우고, 살아온 시간 대신 거주 형태만 남긴 채.
그는 여전히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은 일을 하며 하루를 산다.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다. 누군가의 상자 위에서, 그는 이미 ‘쪽방주민’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름은 편리했다.
쪽방주민이라고 부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묻지 않아도 됐다.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아직 붙들고 있는지까지도 굳이 알 필요가 없어졌다. 그 말 하나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쪽방주민이라는 단어는 설명을 대신했고, 동시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지웠다. 사람은 사라지고, 분류만 남았다. 그가 하루를 어떻게 견디는지보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가 먼저 중요해졌다.
그 이름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방에 누가 살든, 그 사람이 어떤 사연을 안고 오든 상관없이,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같은 이름을 얻게 된다. 문턱을 넘는 순간 이름은 하나가 된다.
쪽방주민이라는 말은 홍길동, 김갑수가 아닌, 공간에 붙은 꼬리표였다. 사람은 잠시 머물다 가도, 그곳의 이름은 그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다음 사람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게 쪽방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고, 이름만 반복해서 불렀다.
그 이름은 누군가의 입을 거쳐 전달된다. 행정의 문서에서, 후원 상자의 라벨에서, 안내문과 공문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이름을 건네는 사람이 된다.
문을 두드리고, 상자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낸다.
“쪽방주민분들께 드리는 물품이에요.”
그 말이 누군가를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규정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그렇게 말해왔다.
어떤 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이는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든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쪽방주민인 적 없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값싸게 잠만 잘 곳이 필요해서 이곳에 왔을 뿐인데, 누군가가 계속 그렇게 불러서 어느새 그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