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이야기 12] 암도 못 꺾은 봉사 본능

버티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

by 진형

어릴 적에 나는 시골에서 컸어. 우리 집은 8남매였거든. 아들 넷, 딸 넷. 열 살쯤 됐을 때, 제일 잊히지 않는 건 막냇동생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이야. 그땐 마음을 주체 못 해서 괜히 친구들한테 화내고 싸움도 걸고 그랬어. 어린 마음에 세상 전부가 원망스러웠던 거 같아.


집을 나온 건 ‘가출’이라기보다, 그냥 내가 스스로 나온 거였어. 농사짓는 게 싫고, 집이 너무 답답했거든. 그래서 14살에 서울로 올라왔지. 올라와서는 닥치는 대로 일했어. 막일도 하고, 고물도 주워 팔고, 심부름도 하고. 그러다 ‘꽃동네’라는 곳을 알게 돼서 8년 동안 봉사도 했어. 목욕 못 하는 분들 씻겨주고, 밥 못 드시는 분들 떠먹여 드리고.


부모님을 시골에 두고 나온 죄책감이 컸는데, 봉사하면서 그 마음이 조금 풀렸어.


생활 꾸리려고 기술일도 배웠지. 용접도 하고, 가게 종업원으로도 일했어. 처음 월급은 2만 원이었는데, 기술 조금 배우고 나서는 15만 원쯤 받았던 거 같아.


그러고 나서 결혼은 소개로 했어. 아내는 마천 쪽에서 분식가게를 했고, 나는 인테리어 일 하면서 살았어.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손님이랑 바람이 나서 한 달 동안 가게를 비우고 집을 나가버렸어. 그때 애가 네 살이었는데, 애만 방에 두고 사라진 거지. 결국 이혼했고, 나는 돈은 한 푼도 안 받아도 좋으니까 애만 내가 키우겠다고 했어. 몇 년 지나서 애는 광주 쪽 친정이랑 친척 도움으로 컸고, 형수님이 많이 도와줘서 대학까지 마쳤어.


한 번은 애를 위해서라도 다시 같이 살아보자고 전처를 찾아갔는데, 처가 쪽에서 반대하더라. 내가 애한테는 “엄마 만나고 싶으면 만나” 그랬더니, 애가 “왜 만나야 하는데?” 이러더라. 그 말 듣고 그냥 마음 접었어.


먹고사는 일은 계속됐어. 막일도 하고, 고물도 주워 팔고, 서울역 근처에서 사촌누나 포장마차도 도왔지. 돈을 좀 벌었을 때도 있었어. 벌면 거의 다 애한테 줬고, 집도 애 명의로 해줬어. 지금은 애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한 달에 200만 원쯤 번다고 하더라. 나는 “내가 번 건 결국 애한테 간다” 생각으로 살았어. 가진 건 많지 않아도 그게 내 선택이었어.


쪽방살이는 거의 30년 됐어. 아는 사람 소개로 방을 구했는데, 처음엔 보증금 25만 원에 월세를 내고 들어갔어. 근데 주인이 방이 크다면서 반을 잘라버리더라고. 월세는 똑같고. 그래서 화나서 발로 차고 나왔어. 그 뒤로 교회 건물 2층에도 살고, 그러다 지금 자리로 오게 된 거야. 방은 늘 좁았고, 생활은 빠듯했지만 그래도 내 자리가 있으니까 버텼어.


건강 문제도 있었어. 어느 날 몸에 혹이 잡혔는데, 상담소에서 “빨리 병원 가라”며 서울의료원으로 연결해 줬어. 그래서 수술하게 됐지. 항암 치료할 땐 머리 다 빠지고, 밥이 목에 안 넘어가서 진짜 힘들었지. 그래도 “살아야지” 하고 억지로 물 말아 밥 삼켰어. 5년간 치료 끝나고 의사가 “암 끝났다.”라고 하더라. 다만 손이 떨려서 신경외과 3개월마다 다니고, 폐 쪽도 주기적으로 검사받고 있어. 근로능력평가 같은 건 암이 끝났다고 인정이 안 된다 해서 좀 답답하더라. 그래도 암에서 벗어난 건 정말 다행이야.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 서울역에서 장사하다가 어떤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길래 내가 119 부르고, 서울역 안내하는 사람한테도 알려서 병원에 데려갔어. 그 사람이 지금 우리 동네 사는데, “그때 안 갔으면 죽을 뻔했다.” 고 고맙다고 하더라. 나는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겐 생명의 은인이었던 거지.


이제 곧 임대주택으로 이사 간대. 작은 방이라도 내 집이 생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놓여. 들어가면? 이제 일은 힘들고, 봉사하면서 살 거야. 그게 내 방식이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붙잡고 사는 건 ‘봉사’야. 어떤 사람은 “봉사하면 돈 많이 받냐” 물어보는데, 나는 돈 받으면 그건 봉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진짜 봉사는 무료로, 그냥 마음으로 하는 거야. 이사 가서도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계속 봉사하면서 살 거야.


그게 내가 살아온 길이고, 앞으로도 지키고 싶은 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