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이야기 17] 환청, 화염병, 그리고 그다음

두 개의 목소리 사이에서

by 진형

어릴 때 돈이 없어서 항상 힘들었어요. 집에 쌀도 없고 라면도 없어서 동생과 굶는 날이 많았어요. 배가 고프면 물 마시면서 배를 채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친척들 덕분이었어요. 특히 막내 고모가 많이 도와줬어요. 도저히 안 되겠으면 막내 고모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고, 방학 때는 큰집에서 지내며 밥을 얻어먹었어요.


불우했죠. 아버지가 반 알코올 중독이었어요. 내가 유치원생쯤 될 때였는데,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엄마를 때렸어요. 결국,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집을 나갔고, 그 이후로 엄마 없이 컸죠. 나도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어요. 동생은 안 맞았고 나만 맞았는데, 장남이라 심부름도 다 하고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은데,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요.


아버지가 웬수 덩어리였어요.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아버지가 때리지 못했어요. 내가 더 크고 힘도 더 세서 아버지가 때리려고 하면 내가 힘으로 제압했어요. 양팔을 잡고 꼼짝 못 하게 했죠. 아버지도 불행한 사람이었어요. 지체장애 2급 장애인이었고, 등에 혹이 있었는데, 어릴 때 높은 데서 떨어져서 그렇게 됐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의 불행한 사연이긴 하지만, 그걸 왜 가족들한테 화풀이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가족들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도 학교는 다니게 해 줬어요.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 등록금은 막내 고모가 내줬고, 2학기부터는 아버지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줬어요. 군대 갔다 온 뒤부터는 내가 직접 알바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어요. 군대 갔다 와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고, 학기 중에도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며 잠이 부족한 채로 졸업했어요.


근데 하필 졸업하자마자 IMF가 터졌어요. 졸업 평점이 3.4였는데, 바로 앞 기수는 그 점수면 기아자동차에 취업이 가능했거든요. 그런데 IMF가 터지니까 취업할 곳이 없었어요. 1년 동안 용산에서 제일제당 서울지사 음료수 사업부에서 배송 보조로 운전기사 따라다니며 물건 나르는 일을 하며 겨우 버텼어요. 중소기업에도 들어가 봤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결국 인력사무실에서 건설 현장 일용직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헤매다가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고, 2002년 12월부터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환청인지 귀신이 들린 건지 몰라서 몇 개월을 혼자 헤맸어요. 그러면서 일도 못하니까 신용카드로 생활비를 썼고 외환신용카드 빚이 생겨났어요.


환청은 두 가지 목소리였어요. 남자 목소리는 내가 잘못한 걸 지적하며 죽으라고 했고, 여자 목소리는 나를 방어해 줬어요. 그런데 남자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여자 목소리는 사라졌어요. 결국 극도의 스트레스로 자살을 시도할 뻔했죠.


2003년에 결국 가족의 권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정신분열증(지금의 조현병) 진단을 받았어요. 약이 다행히 잘 들어 증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정신과 병력 때문에 정상적인 회사 취직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그 어느 회사 사장이 정신과 병이 있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직원으로 채용을 안 하죠.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인력 사무실에 정신과 얘기를 안 하고 속이고 다니는 거였어요. 나도 그렇게 몇 년을 다녔어요. 병원 가는 날은 그냥 아파서 쉰다, 힘들어서 쉰다 하고 넘어가면 됐어요. 인력 사무실은 일주일에 2~3일만 일하는 사람도 많아서 그냥 안 나오면 그만이었거든요. 하지만 일반 회사는 그렇지 않잖아요. 병가를 내려면 사유가 필요하니까 취직은 사실상 불가능했죠. 정신과 병은 사회적으로 제약이 너무 많아요. 정신과 병만 없었다면, 공조 냉동기사 1급 자격증도 있었으니까 건설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공장 일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건설사 쪽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2005년 겨울, 모든 걸 포기하고 가방 하나만 가지고 전라도 광주까지 걸어가며 전국을 떠돌았어요. 사람들 피하고 싶어서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그냥 나 혼자였어요. 그럼 어떻게 먹고살았냐고요? 밤이면 유흥가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음식을 얻을 수 있었어요. 누군가 돈을 줄 때도 있었고요. 돈이 생기면 편의점 가서 소주 한 병에 담배 한 갑 사고, 컵라면 하나 사서 끼니를 때웠어요. 돈이 없을 때는 배달 음식 남긴 거, 대학가나 유흥가에서 나오는 음식들 얻어먹었고요. 그렇게 먹고, 남의 건물 옥상에서 몰래 자거나 여름에는 공원에서 자기도 했어요. 그렇게 살아도 생존은 되더라고요. 안 죽더라고요.


광주에서 1년을 보냈고, 그 뒤로 전주에서 1년, 대전에서 1년, 수원에서 6개월을 보내며 조금씩 북상했어요. 그러다가 2008년에 다시 서울역으로 왔을 때 환청 증상이 극도로 심해져서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약을 못 먹었어요. 4년간 노숙하면서 정신과 약을 완전히 끊겼거든요. 병원을 안 다니니까 약도 없고, 점점 환청은 심해지고. 근데 운이 좋았던 건, 서울역에 '다시 서기 진료소'가 있었던 거예요. 금요일 저녁이면 정신과 진료도 해줬어요. 그걸 어떻게 알게 돼서 찾아갔고, 거기서 은평시립병원 소속 정우진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선생님이 약을 처방해 줬고, 약을 먹으니까 환청 증상이 조금씩 작아졌어요.


서울역은 노숙하기에도 나쁘지 않았어요. 무료 급식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시간만 잘 맞추면 하루에 세 끼도 먹을 수 있었어요. 정신과 약 먹고, 밥도 먹고, 증상도 잡히고. 그러니까 생각이 좀 달라지더라고요. 어느 가을, 추석 전이었는데 구세군에 밥 먹으러 갔더니 성심 인력에서 승합차가 와서 일 가실 분 있냐고 묻더라고요. 성심인력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지금 여기 쪽방에서 살게 됐어요.


이곳에 살면서 화염병 사건도 있었어요. 최 선생님한테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상담소 잘못이 반이고, 내 잘못도 반이에요. 새로 온 직원들이 두 달 만에 다 나가버렸어요. 직원들이 자꾸 바뀌니까 나도 욱하고 술 마시고 홧김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돌이켜 보면 내 책임도 있지만, 상담소도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3년 전쯤 일인데, 거미 형이라고 불렀던 형하고 술 마시다가 싸웠어요. 술 마시고 분위기가 안 좋아졌는지, 갑자기 형이 소주병으로 내 머리를 내려쳤어요. 그 일로 머리를 네 바늘 꿰매야 했어요. 나는 피해자고, 그 형이 가해자였죠. 그래서 결국 형사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 형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받았어요. 근데 다른 사건까지 겹쳐서 결국 1년을 더 살게 됐죠.


사실 내가 그때 더 심하게 맞받아쳤다면 나도 감옥 갔을 거예요. 근데 왜 싸웠는지 솔직히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나도 술이 꽤 들어갔던 상태라… 이유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맨 정신에는 절대 그런 일 안 벌어졌을 텐데, 술 마시고 맛이 가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침에 토담(동행식당) 가서 밥 먹고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사무실(상담소) 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하고 장난도 좀 쳐요. 그러다가 편의시설에 가서 좀 놀다가, 12시쯤 되면 방에 들어가서 낮잠 좀 자요. 그 뒤에 할 일 없으면 다시 편의시설 가서 TV나 보고 커피 마시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그냥 그렇게 지나가요. 사실 좀 따분하죠.


췌장 수치도 안 좋게 나왔어요. 그래서 술도 못 마시죠. 옛날에는 그래도 술 마시는 게 낙이었는데, 지금은 그 낙도 없어졌어요. 이제는 술을 못 먹으니까 좀 답답하기도 하고요. 병원에는 21일 날 다시 가봐야 해요. 기분이 썩 좋진 않아요. 내가 가끔 농담 삼아 "백 살 잔치하겠다!" 이런 얘기도 하는데, 솔직히 요즘은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 들어요. 심리적으로도 요새는 좀 안 좋아요. 하지만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고요. 건강 때문에 술도 거의 못 마시니 좀 답답하기도 하지만, 곧 임대주택으로 들어가니 쪽방 생활보다는 낫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관리아줌마와의 관계 속에서 어려웠던 점은 별로 없었어요. 내가 방세를 잘 내니까요. 근데 위기는 한 번 있었죠. 고관절, 인공관절 수술받을 때였는데, 그때는 기초수급자가 아니었어요. 방세를 두 달 못 냈죠. 근데 아줌마가 그걸 봐줬어요. 수술받고 와서 수급만 되면 천천히 갚으라고. 그때가 위기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방세를 밀린 적은 없었어요. 수급날 되면 한 달 치 딱딱 내니까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죠. 예전엔 술 먹고 사고 좀 쳤는데 아줌마도 술 드시고 사고 치시니까, 뭐 서로 이해하는 거죠.


여태까지 돌아가신 분도 많아요. 동네에서 알고 지내다가 가신 분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은 갑진이 형이에요. 갑진이 형이랑은 술을 많이 마셨어요. 용산에서 놀기도 했고요. 그 형은 해피인 관리 팀장이라고 직책도 있었고. 거기서도 술을 많이 마셨죠. 얘기도 많이 나눴어요. 근데 갑진이 형은 반 알코올 중독 상태였어요. 하루도 술 안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죠. 결국 그게 원인이었을 거예요.


제 소망은 로또 복권 1등 당첨되는 거요. 진담이에요. 당첨되면 바로 떠나서 조용히 국숫집을 차리며 살고 싶어요.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엄마와 동생이에요. 엄마가 연세가 많아서 걱정이 많아요. 가족을 잃는 게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