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첫 독서 [용서에 대하여] - 강남순, 동녘
1. 작년에 사서 절반 읽고, 삶에 치여서 읽지 못한 책을 다시 꺼냈다. 새해를 맞이하며 '용서'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아서, 이 책을 들었다.
신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독교인으로 너무나 당연한 삶의 패턴이었는데, 올 해는 '당연한 것에 대한 의문' 때문에 하루가 지난 지금,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 조용히 내 삶의 숙제와 하나님에 대해 질문한다.
2. 두루 많은 사람이 선하다 생각하는 착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때론 '타인을 향한 통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타인에게 선물을 한 것은, 사랑의 행위이지 그가 응당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그가 상대적으로 나에게 그런 행위로 '보답'을 하지 않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와 나의 관계는 <부채 관계>로 바뀌기 쉬웠다. 그 사람은 모르는 나 스스로 그에게 부여한 심정적으로 '받을 것'이 늘 있었다. 그것이 '인정'이든, '사랑'이든.
나도 나를 챙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을 챙기고 다니던 20살의 나는 처음으로 '타인이 원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를 해줄 때는 '받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물리적인 대가 외에도 '심정적인 보상', 즉 너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숨겨진 의미들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쿨한 사람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3. 하지만 '용서'의 측면은 조금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면 ~해야 해'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상처가 될 때가 많았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나는 의미 없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져 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가 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누군가 나를 집단적으로 가해를 하더라도 나는 믿는 사람으로 '용서'를 해야 했다. '용서'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실격된 존재'이자,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인내의 아이콘이 되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힘든 것을 잘 견디고, 나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나를 짓밟는 사람들의 무례함에도 '웃으며'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고 살았다.
4. 사랑은 무엇이고, 용서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용서를 하는 자'가 무조건 참을 때 가질 수 있는, '피해자'로서 정체성과 윤리적 우월감을 갖고 살았다.
나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인데, 모두를 위한 '평화'라는 이름으로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참고 희생하다 보니 겉으로는 천사표 이미지를 가졌으나 속으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가 많았다.
강남순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내가 왜 그토록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다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는 사람으로, 용서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잘못의 감옥'속에서, 미래를 행해 한 걸음을 내딛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묵상하며, 첫 독서를 마친다.
이하, '용서에 대하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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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준 '내'가 여타 감정적, 실질적 권력 행사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전혀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물에 대한 데리다의 이해는 환대나 용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용서의 공식이 적용되는 상황을 한번 그려보자.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면서 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해준 '나'를 보면 언제나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용서받은 후에는 변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용서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대와 지평'을 설정해 놓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용서 과정에서 용서하는 '나'를 용서받는 사람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하고 용서 행위를 마치 '선심'을 베푼 것인 양 생각할 수 있다.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사랑할 만한 것만을 사랑한다면, 이미 '사랑'이란 이름을 가질 가치가 없는 것처럼, 용서할 만한 것만을 용서할 때 이미 '용서'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가치가 없다... 무조건적 용서는 용서가 용서자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랬을 때 범죄자는 범죄자로, 피해자는 피해자로, 영원히 남게 되며,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그대로인 채 범죄행위가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
용서가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하나 아렌트는 용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열어주는 행동이라고 본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러한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가 상처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 삶의 조건에 용서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을, 또는 타자를 '잘못의 감옥'에 가두고 현재나 미래의 부재 속에 '과거의 존재'로만 살아갈 것이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의 여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정으로서의 용서는 끊임없이 더욱 완전한 용서, 더욱 무조건성에 가까운 용서를 생각하고 그것을 항해서 나아갈 것을 상시키킨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발걸음을 한 걸음씩 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서가 언제나 여정인 이유이며,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용서의 실천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