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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Oct 09. 2023

두성

이제 와서 득음하면

딱히 노래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내 이야기다.


내가 노래를 정말 시간 들여 연습하기 시작한 지 거의 20년이 됐다.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목소리였는데 사춘기가 시작되고 어느 날 변성기가 찾아오자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오는 정도까지 목이 잠겼고 노래를 좋아했지만 부를 수는 없어서 오랜 시간 동안 콧노래 말고는 부르지 않고 지냈었다.


유학을 하던 당시 한국애들끼리 모여 곧잘 놀곤 했었는데 문화는 어디 가는 게 아니라서 꼭 모여있다 보면 한인타운에 있던 노래방에 몰려가 몇 시간 동안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어딜 가나 그렇듯 중학생 밖에 안 된 그 어린 나이에도 바이브레이션까지 능숙하게 넣어가며 노래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랑 가장 친했던 친구는 그중에서도 노래를 가장 잘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찰지게 노래 가는지 신기한 친구였다.


기가 죽었던 나는 초반 몇 번을 계속 거절하다 결국 노래를 하게 됐는데 반응은 야유도 칭찬도 없는 무난함이었다. 아, 아무도 신경 안 쓸 정도는 되는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조용히 넘어갔었다.


얼마 지나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기숙사 휴게실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대뜸 노래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봤고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친구는 그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심지어 타고음정도 제법 높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을 거라며 노래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조악했다. 그 친구는 타고난 느낌으로 부르던 친구라 힘을 좀 더 넣어봐라, 고음에서 조금 더 소리를 명확하게 내봐라, 정도의 단순한 조언들만 해줄 수 있었지만 무엇에든 몰입할 거리가 필요했던 차라 몇 달간 같이 노래를 연습했다.


미국에 서로를 까내리는 농담을 하거나 랩을 하는 문화가 있다면 한국은 노래방에서 다 같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문화가 있고 학창 시절 노래를 잘 부르는 건 가장 쉽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장기였다.


꾸준히 연습했던 내 노래는 어느덧 기초가 잡혀있었고 나름의 호흡법도 몸에 익어있었다. 당시 인터넷에는 글로만 떠도는 창법 상식들이 난무했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중구난방에다 써놓는 사람마다 다른 논리들을 그럴싸하게 적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디에서 뭐 좀 있어 보이는 글을 볼 때면 어쩌면 이런 느낌을 말한 건가 싶을 때까지 혼자 방 안에서 매일 몇 시간이고 연습을 했었다.


한국을 제외하면 인터넷이 정말 열악하던 시절이라 노래 하나 받으려면 한참이 걸렸지만 한국에서 새로 나왔다는 노래들을 기어이 찾아내 연습했고 방학을 맞아 한국에 갈 때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노래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짧은 방학 동안 이성친구들이 오는 자리에도 낄 수 있었고 최신 유행이나 공감대는 떨어졌지만 노래방만 가면 무리에서 나의 지위는 갑자기 리더급으로 올라갔다. 글을 쓰면서도 참 그런 시절이 있었지 싶다. 요즘도 그럴라나. 다르겠지.


10대 때 나의 노래는 딱 그냥 중음. 톤만 생각하면 별 특징 없는 목소리였지만 워낙 호흡이 길고 성량이 좋아 다른 친구들과 한 소절씩 이어부를 때면 볼륨이 갑자기 커져 같이 부르던 다른 친구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거의 매일을 혼자 집에서 몇 시간 동안 수련하는 사람처럼 소리 내는 법을 연습할 때라 그랬던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소리가 바뀌지 않는데도 질리지 않고 연습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성격 자체가 하루종일 몇 가지를 꾸준히 반복하던 때라 그대로 노래에 묻어 나왔던 것 같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노래를 불렀더니 자꾸 소리가 흔들리길래 일부러 걸어 다니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방학이라 한국에 와서도 계속 노래를 연습하는 날 보며 가수 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연습하냐고 타박을 하셨었다. 본인은 뭐 연예인 하려고 매일 그렇게 옷 빼입고 화장하셨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노래를 불렀다가 음정이 다 나가는 바람에 대망신을 한번 당한 이후로 취했을 때 노래 부르는 것도 따로 연습했다. 참 열심히 했다.


그때 쓰던 창법이 흉성이었다고 기억한다. 두껍고 큰 소리를 좋아했으며 타고난 성대가 굵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노래는 그 방식으로 다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종종 고음을 쉽게 내는 친구들을 만나면 내 노래는 항상 2순위로 밀렸는데 어떻게 다들 그런 고음을 낼 수 있는지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때 한참 나와 노래방에 같이 다니던 고향친구는 노래로 친해졌던 친구였는데 다른 친구들이 피시방에 가서 놀 때 우리는 그 돈으로 노래방을 갔었다. 그 친구는 가수들도 내기 힘든 고음을 자유롭게 내는 친구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친구가 내는 음역대를 낼 수 없자 나는 그 친구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을 더 파고들었다.


둘 다 참 고집이 셌었는데 같이 노래를 부르고 어떻게 하면 더 노래를 잘할 수 있는지, 어떤 가수의 노래가 좋은지, 어떤 명곡들이 있는지 얘기할 때면 밤늦도록 차가 끊겨도 지칠 줄 몰랐고 또 즐거웠다.


20대가 된 나의 노래는 10대 때와는 전혀 다른 노래였다. 대학 시절 노는 걸 좋아했던 난 매일 술을 마시고 골초에 바이크를 타고 달리면서도 노래를 부르던 때라 목소리에 쇳소리가 났었는데 노래는 또 꾸준히 계속 부를 때라 보통은 사람들이 힘든 거친 소리로 부르면서도 노래를 오랫동안 불러왔었기 때문에 완급이 좋았다.


공부할 때가 아니면 매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더니 언젠가부터 성량이 너무 커져 같은 건물에서 항의가 자꾸 들어왔고 그때부터 일부러 목을 꽉 닫고 소리를 작게 내는 버릇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성량은 줄었지만 목근육 움직이는 게 좋아져 이상한 기교들은 늘었다.


군대에서도 선임들이 노래나 기타 치는 방법을 물어보며 은근슬쩍 챙겨주기도 했었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회식 한번 하고 나서는 새로 들어온 걔는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하냐며 놀랐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티비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줄을 이었고 자극은 끊길 일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매일 노래를 불렀고 새로운 장르와 창법들을 연습했다. 결국 회식자리나 사교모임 뒤풀이로 가던 노래방만으로 성에 안 찼던 나는 보컬을 모집한다는 밴드 공고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한 밴드에 들어갔다.


밴드 오디션에 두어 번 정도는 떨어졌었다. 나름대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블루스 리듬의 무거운 노래들은 정말 마이너 한 장르였고 꼭 갈 때마다 고음을 뽑아내는 지원자들에게 밀려 떨어졌었다.


지금도 첫 오디션이 기억나는데 나는 드럼소리가 좁은 합주실에서 들으면 그렇게 큰지 몰랐다. 처음이라 긴장도 되는데 옆에서는 악기소리들도 너무 크지, 평소 내가 부르던 정도의 3할도 못 부르고 광탈했다.


세 번째로 어느 오디션에 갔을 땐 악기소리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되든지 말든지 그냥 산책 가는 기분이었는데 다행히 오디션 곡이 그리 높은 음정도 아니라 마음도 편했었다. 그냥 적당히 부르고 끝나니 기타를 치던 리더가 뭔가 애매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날 보컬 지원자들이 대부분 성량이 크진 않았었는데 악기소리를 뚫고 소리를 내는 건 나밖에 없었지만 오디션 곡이 정통 락에 가깝다 보니 내 장르도 아니었었다. 내가 부르면서도 좀 애매했다.


혹시 평소에 부르는 노래들이 따로 있냐는 말에 비도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겠다 놀다 가자는 마음으로 블루스를 묵직하게 갈아서 불렀더니 리더가 크으, 하는 소리를 내며 합격사인을 보냈다. 애초에 부르면서도 이건 됐다는 느낌이 왔었다. 사실 리더는 블루스를 하고 싶었는데 워낙 장르가 마이너라 오디션곡을 좀 편하게 락으로 정해봤대나.  


그렇게 밴드를 시작해 4년 간 회사생활과 병행하며 꾸준히 합주를 하고 대학로를 전전하며 자잘하게 공연을 할 기회들을 가졌었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노래를 시작하고 가장 연습을 안 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어차피 합주하러 가면 질리도록 불러야 하지, 평소엔 가사 외우느라 바쁘지, 시간이 나면 이상한 공연 퍼포먼스만 구상하며 실제 노래 연습은 좀 소홀했다.


한참 지나고 알았는데 사실 내가 성량이 워낙 큰 편이라 다른 멤버들이 자기들 악기 소리를 더 키워놨던 통에 내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멤버들 모두 자기 소리를 더 크게 내기 바빠던 시기라 아무도 서로를 모니터링하지 않던 상황에서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안 좋은 버릇들이 가장 많이 생긴 시기이기도 했다.


한 날 음악을 꽤 오래 했던 형이 합주실에 놀러 왔다가 우리 연습을 구경하게 됐고 다른 멤버들이 없을 때 내게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그 후로는 합주 때마다 헤드폰을 썼고 그제야 내 목소리를 다시 잡아가며 부를 수 있었는데 그때 마이크 음량 조절하는 법도 같이 배웠다.


밴드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밴드의 색깔이 확실하다는 건 한계도 명확하다는 뜻이 된다. 밴드 보컬들이 따로 솔로앨범을 내는 건 그런 갈증에서 나온 결과겠지. 사람들은 보컬만 기억하지만 밴드는 팀이 다 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악기를 맡는 멤버들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보컬만 유독 튀는 상황을 달가워하기는 힘들다.


경험이나 연륜이 있는 멤버들은 되려 보컬이 돋보이도록 배려를 해주곤 했으나 내가 있던 밴드는 젊었고 다들 개인 욕심이 많아 오히려 악기 쪽이 신나고 보컬은 불리한 선곡을 종종 했으며 나이로는 막내였던 내가 어쩌다 악기 파트에 뭔가 걸고넘어지는 날이면 곧장 감정싸움으로 번지곤 했었다.


편하게 노래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다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장르의 곡을 선곡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그래서인지 끝내는 계속 비슷한 느낌의 곡들이 이어졌고 다른 팀으로 가기까지 3년 정도 동안은 밴드 보컬로서의 노래는 많이 했지만 노래 자체에는 열정을 잃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마지막 1년은 따로 친하게 지내던 형들과 심심해서 모여 놀던 게 밴드활동이 되며 처음으로 자유롭게 공연다운 공연을 준비했었는데 형들이 배려를 많이 해준 덕이었다. 놀고 싶은 만큼 놀아보라는 말에 선곡을 거의 내 위주로 짰고 형들은 평소 나와 같이 질리도록 술을 마시며 내 성격을 이해해 왔던 만큼 기가 막히게 자기 파트들을 편곡해 합주 때마다 나를 감탄하게 만들고 내 입에서 절로 감사인사가 나오게 했다.


너무 재밌게 놀아서 미련이 다 타버렸기 때문일까. 1년이 채 안될 무렵 우리는 자연스럽게 흩어져 그냥 보통 사람들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가끔 만나 술이나 마시고 노래방이나 가서 아무 노래나 불렀다. 이따금씩 합주나 하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고 몇 달 서로 연락 없는 루틴으로 이어졌다.


그 후로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항상 노래를 듣고 있었지만 연습은 하지 않았다. 일이 바빴고 술자리가 이어지면 다음 날은 쉰 목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어쩌다 노래방에 갈 일이 생기면 대충 신나는 노래나 부르면서 분위기만 맞추다 집에 왔다.


언젠가는 자주 가던 바의 사장이 새벽에 혼자 기타 연습을 하고 있길래 재밌는 걸 보여줄 테니까 하이볼 한잔만 공짜로 달라고 했다. 기타를 집어 들고 그럴싸한 노래나 한곡 했다. 믿거나 말거나 자유지만 여기저기서 노래를 하도 불러보면 자주 가는 공간에서 어떤 노래를 어떤 식으로 소리 내며 불러야 남들이 감탄하는지 알게 된다. 당연히 하이볼은 공짜로 받았고 그 후로도 몇 잔 더 받았다. 내게 어느덧 노래는 딱 그 정도였다.


주위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수 오디션을 보라는 권유를 종종 했었지만 나는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고 그중 극소수만이 우리가 이름이라도 한번 들어본 사람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극소수들 중 정말 시대를 잘 만난 사람만이 유행이라는 파도를 만난다는 것도, 그중에서 다시 극소수만이 한 번이라도 다시 회자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겐 그런 도박보다 생활이 더 중요했고 오히려 회사생활은 조금만 더 열심히 해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게임이었다. 괜찮은 동네에 살며 괜찮은 회사를 다니며 그럭저럭 사는 내 인생이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다. 어느덧 노래를 잘한다는 게 그냥 내 몸 어딘가에 점이 하나 있다 정도의 의미가 됐던 것 같다.


이따금씩 유행하는 노래들을 혼자 불러볼 때가 있었는데 실력이 더 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냥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더 능숙해지는 정도의 느낌만 왔다. 사는 게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내 노래가 딱 그랬다.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알고 보니 내 직장 근처로 상경을 한 상태였다. 몇 년 만에 본 얼굴일까. 우리는 자동으로 술에 취해 노래방을 갔고 친구는 여전히 고음을 뽐내며 노래를 불렀다. 예전보다 연륜이 느껴지고 능숙해진 정도. 내가 노래를 한곡 끝내자 친구는 얼떨떨해했다. 변한 목소리, 본인이 생각하지 못한 리듬, 외국 노래에서나 듣던 테크닉, 마이크가 굳이 필요 없는 성량 등등. 친구가 부럽다는 말을 하면서도 씁쓸하게 서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그때 이미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제 앞으로 진지하게 노래 부를 일이 없을 거라고. 이제 와서 실력이 는다 한들 뭐 하겠냐고.


정말로 그 후로는 우리가 만날 일이 없었다. 서로 한두 번쯤 술은 마신 적이 있지만 노래방을 가지도,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사는 고충 정도나 나누다가 헤어졌고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는 우리들은 이제 친구가 아니었다. 노래로 만났으니 노래가 끝나면 관계도 끝인 거지.


내 결혼식 축가를 내가 직접 불렀던 건 아직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흑역사다. 내가 불렀던 노래가 친구들과 만난 가게에서 흘러나오면 친구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나는 짜증을 내며 다들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고 투덜거린다. 친구들은 사장님께 그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틀어달라고 농담을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다.


아내는 내가 종종 집에서 콧노래를 부르면 질색을 했다. 귀가 울려서 듣기 힘들다나. 어느덧 그냥 흥얼거리는 일만 종종 있을 뿐 노래방 가는 일이 1년에 한두 번 되지도 않았다. 기타 케이스는 열어보지도 않은 게 몇 년이고 어쩌다 만난 사람들과 뒤풀이로 노래방을 가도 한곡도 채 끝나기 전에 목이 갈라졌다. 내가 노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갔고 어쩌다 예전에 밴드를 해봤었다는 얘기는 대화가 루즈해지면 분위기를 잠깐 전환하는 농담 정도로만 쓰곤 했다.

 

개인사업을 시작한 후로 내 걱정은 온통 돈이었고 내년에도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 빨리 자리를 잡아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가야 한다는 압박만 있었다. 노래는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오디션 프로그램의 상금을 보고 한 번쯤 지원해 볼까 고민을 해봤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참가자들에 나와 노래 부르는 걸 보고는 신청 안 하길 잘했다며 낄낄거렸다. 재수 좋게 방송까지 나갔으면 그 노래 잘하는 괴물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지 않았을까. 좋겠다 다들. 노래 잘해서.


그렇게 흥얼거리는 일조차 줄어갔다.


굳이 노래이야기를 여태 이어나간 건 내가 가장 오래 해온 일이기 때문이고 내가 타고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도 같은 결에 있는 무언가라면 아마 같은 흐름으로 이 글을 썼을 것 같다. 나한테는 그게 노래였을 뿐.


어느 날부터 장거리 운전이 많아지며 차 안에서 졸음을 이기려 흥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잘 불러야 한다는 개념자체가 사라진 상태여서 그런지 그냥 아무렇게나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예전에 내가 노래를 어떻게 부르던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소리 어떻게 내는 거더라.


그즈음이 사실 이혼 소송을 겪으며 몇 달을 앓았다가 일어났던 상태라 몸에 있는 근육도 거의 다 사라지고 기력도 없어 소리도 힘없이 나오고 있었는데 오히려 힘없이 나오는 소리가 더 맑게 내기 쉽다는 걸 우연히 깨달았다.


그때 본능적으로 그동안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요즘 SNS가 참 좋은 건 가장 최근의 지식들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보컬 지식 역시 예전보다 훨씬 진보된 상태였고 어지간한 영상에 있는 설명들이 10년 전 내가 찾아다녀야 했던 레슨 선생님들의 설명보다 쉽고 정확했다.


그때부터 차에서 보내던 몇 시간 동안 소리 내는 방식들을 다시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전 같으면 선택지에도 없던 고음의 노래들을 목표로 삼으며 영상에서 알려주는 방식대로 소리를 내보고 노래로 불러보기 시작했다. 고음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방식의 문제라고 했다. 어릴 때는 이 말이 이해가 안 됐지만 서른이 넘고 나니 그 말이 이해되고 실제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따라 해 보니 정말로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피치의 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되는구나. 이게 두성인가 보다. 지금도 그 설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사람 몸이 정말 웃긴 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버릇들이 다시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건조식품이 물을 먹으면 다시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처럼 일정 조건들이 채워지자 예전처럼 목 어딘가에 힘이 들어가고 어느 발음은 입을 다물고 먹어버리는 등 새로운 연습들을 방해했다.


실제로 새로운 소리들을 노래로 부를 수 있기까지는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성대는 근육이고 어느 결과물을 위해 필요한 근육이 자라며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내 경우엔 아예 처음 배우는 사람보다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나는 내 예전 버릇들과 싸워야 했다.


어릴 적부터 애써오고 노력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오히려 내 발목을 강하게 잡았다. 나는 새로운 방식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 쌓여있던 노력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마저도 처음엔 왜 자꾸 목소리가 어느 음에서부터 튀고 톤이 뒤집어지는 이유를 몰랐다.


우연히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저음에서의 발성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항상 저음을 낼 때 또렷하게 내려 노력했었는데 그렇게 성대를 처음부터 단단히 잡고 있으면 고음부로 갔을 때의 성대모양이 내는 소리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저음부터 소리를 편하게 내야 고음부로 이어져도 톤이 자연스럽게 유지되는데 나는 늘 그걸 호흡을 더 많이 밀어내는 걸로 해결하려 했다.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이니 쥐똥만 한 성대근육이 버티나. 고음에서 호흡 압력을 못 버티고 풀리거나 몇 곡 부르지도 못하고 목이 갈라지는 이유가 그거였는데 나는 그걸 어떻게든 이겨내려 연습량으로 밀어붙이는 길을 걸어왔었다. 호흡을 강하게 내지 않으면서도 소리를 또렷하게 유지하는 연습을 계속해나갔다.


이전의 버릇들을 없애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계속 만날 수 있었다. 이 버릇이 왜 생겼었는지 알기 시작했다. 아, 나는 이런 톤이 나오는 걸 싫어했었지. 맞다, 나는 그때 이런 느낌을 주고 싶어 했었지. 그때 그 선생님은 나한테 이렇게 소리를 내라고 했었지. 마치 비석에 새겨진 것처럼 예전의 경험들과 결정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노래 연습을 하면서 이전 버릇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계속했던 말이다. 성대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에 맞춰 소리가 더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힘을 빼보고 어느 근육을 더 풀어보기도 어느 쪽은 살짝 긴장시켜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밸런스를 잡아갔다.


이게 맞는지 틀린 지는 공명이 되는 정도로 감을 잡아갔다. 거실에서 혼자 소리를 내보면 뭔가 맞춰졌을 땐 힘을 주지 않아도 거실 전체가 울린다. 공간이 진동하는 느낌이다. 반대로 어딘가 막혔으면 아무리 힘을 더 줘도 거실이 울리지 않고 소리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렇게 1년 여를 연습하니 이전에는 부를 수 없던 고음역대의 노래들을 연이어 부를 수 있게 됐다. 그제야 예전에 고음역대를 내던 내 친구들이 왜 그런 부분에서 그런 표정이나 톤을 내며 음을 끌어올리고 정리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막상 도달하니 조금 허무했다.  


꽤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가 있었는데 저음부에서 고음부로 넘어가는 구간이 깔끔하지 않았다. 흔히 파사지오라고 부르는 구간이었는데 아예 처음부터 음역대가 높은 노래들은 되려 부르기 쉬웠지만 어중간한 고음역대의 노래들은 오히려 부르기 힘들었다.


힘을 더 주면 고음에서 깨지고 힘을 빼면 저음에서 붕 뜨는 딜레마에 갇혔었는데 이건 엉뚱한 사건을 계기로 해결됐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집 근처의 코인노래방에서 연습했던 노래들을 부르곤 했었는데 막상 마이크를 들면 긴장을 해서인지 집에서 부르던 느낌대로 노래가 나오지 않았고 항상 그 중간 부분에서 음이 한번 뒤집히거나 톤이 불편하게 바뀌는 일이 많았다.


한날 기분전환 겸 조금 멀리 떨어진 가게로 갔었는데 거긴 음향이 정말 잘 잡혀있는 곳이었다. 어느 음을 내도 편하게 낼 수 있었고 대충 불러도 잘 들렸다. 그날은 그냥 편하게 노래를 불렀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녹음했던 걸 들어보니 저음부가 또렷했다.


그제야 나는 저음부에서 힘을 빼도 충분히 들린다는 것, 음향 세팅 상태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불러도 다르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옛말에 무릇 흔들리는 건 나뿐이라고 했나. 음향 상태가 안 좋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힘을 더 주거나 덜 주니 노래 전체가 흔들렸었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은 조금 떨어진 그 가게까지 가서 노래를 했지만 다시 얼마 뒤부터는 근처에 있는 그 가게로 다시 출근부를 찍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장비 탓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음향 상태가 개똥인 그곳에서도 잘 부를 수 있을 정도면 어딜 가도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믿음이었다.


원인을 알고 나니 의외로 금방 해결됐다. 나는 집 근처의 가게에서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는데 워낙 음향 상태가 구리긴 해서 자주 가진 않는다. 갔다 오면 이상한 버릇들이 종종 생겨서 돌아오곤 한다.


그 가게에 방이 14개 정도 있는데 거기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본 적 없는 이유가 괜히 있을까 싶다.


가장 최근 다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습으로 어지간한 노래들, 여자 가수들의 노래마저 별 무리 없이 부를 수 있게 될 정도로 음역대는 넓어졌지만 항상 어느 정도의 텐션은 들어가 있었다. 한두 곡 부르고 나면 목에 피로감이 왔고 잠깐 쉬어야 다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 현상이지만 자꾸 안에서는 뭔가 아니라는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몇 곡 더 부르고 싶다는 욕심이랑은 다른 감정이었다. 정말 뭔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따라다녔다. 내가 정말 편하게 부르고 있다면 이것보다는 더 오래 부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가장 편하게 소리를 내는 방식을 찾아가며 연습해 본 후 다시 가게에 가서 노래를 불러봤다. 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헤드셋까지 끼고 한 시간가량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어차피 기본은 깔려있겠다 내가 편한 방식대로 불렀더니 한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불러도 그럭저럭 계속 여유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녹음을 들어보며 나는 말이 없었다. 이상했다. 뭐지 이 낯선 목소리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너무 힘을 뺐나. 그냥 편한 대로 나왔던 내 목소리는 내 생각보다 너무 가늘었고 퍼지게 들렸다. 그 후로 톤을 몇 번 조절해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노래 흐름이 깨졌고 한번 편한 느낌을 찾자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게 거북해졌다.


음악을 전공했던 누나에게 녹음파일을 보내줬더니 누나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목을 쓰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제는 그냥 소리만 내는 느낌이라 듣기 편하다나. 목소리가 이상하지 않냐고 하니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가 원래 그렇다는 담백한 말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결국은 그게 내 목소리라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왜 그 가수처럼 소리가 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노래를 보르고 싶다. 이 부분을 이렇게 부르면 좀 더 좋아 보일 것 같은데. 그런 생각들은 내가 노래를 불러놨던 내내 소리라는 형태로 내 노래에 붙어있었으며 내가 편하게 노래를 부르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가진 원래의 목소리로 살아온 중 가장 편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지만 내 스스로가 나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최근 부른 노래들을 몇 번이고 다시 들어봐도 참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떡할까. 평생이 걸려도 자기 본모습을 못 찾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는 내가 본래 타고난 모습을 찾았는데도 탐탁지 않아 하는구나.


한동안 이것저것 하도 열심히 찾아봤던 탓인지 SNS 알고리즘에 계속 보컬 연습 관련 영상들이 뜨는데 이제는 어떤 영상들을 봐도 조금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물론 영상을 올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영역에서 경지를 이룬 사람들이고 아마 같은 노래를 부른다면 나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깊이 있게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어떤 길을 걸어가며 겪은 깨달음을 정리해 알려주는 것 또한 의도가 어찌 됐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성이고 믹스보이스고 나발이고 그냥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 거라고 해야 할까.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창법이나 노래가 그럴 뿐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된다고, 저렇게 하면 된다고 알려주는 것들은 그 사람들이 그간 겪은 이야기들일뿐. 잠깐 경유지가 같았을 뿐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해 다시 다른 곳을 향해 간다. 이렇게 하면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이렇게 가는 게 더 쉽다고 말하는 건 당사자의 체험담이다.


지금의 내 노래는 목적이 없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어떤 노래를 멋있게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이 노래가 나를 돋보이게 해 준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그냥 혼자서 소리를 내고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에 대해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오늘 뭔가 컨디션이 안 좋구나, 오늘은 내가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구나, 근데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운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느낌이 이럴까. 웨이트를 하는 사람이나 명상을 하는 사람, 그래 어쩌면 종목과는 상관없겠다. 수단이야 어떻게 됐든 본연의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혼얘기를 하다 갑자기 노래얘기로 빠졌지만 어차피 내게 이건 또 다른 이혼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연애시절 아내는 내 노래를 참 좋아했었고 사이가 항상 서먹했던 처가부모들조차 밖에서 누가 노래를 하는 걸 들으면 사위가 더 낫다고 말했었다. 이혼 소장이 벌어질 무렵의 아내는 내가 거실에서 노래를 흥얼거리자 시끄럽다며 짜증을 냈었다. 그냥 사람이 싫었던 거겠지.


한때는 노래 좋아하는 여자를 만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해봤었는데 의미 없지. 싸울 거면 어떻게든 싸웠을 테니. 그냥 내 본연의 모습을 우선 계속 찾아가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노래를 통해 내 진짜 모습의 일부를 볼 수 있었고 그 덕에 내가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의 또 다른 부분들을 다른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 만났을 때 조금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면 된 것 같다.


어느 순간 정말로 내 노래가 더 이상은 변할 일이 없다고 느끼는 날이 온다면 그때 만나는 사람과는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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