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쓰고 있는 키보드 한 대가 있다. 기계식 키보드 저소음 적축. 흰색과 내가 좋아하는 핑크색이 섞인 키보드로, 라이팅 설정을 하면 키를 누를 때마다 핑크빛 불이 반짝인다. 스페이스 키에 벚꽃이 그려져 있는데, 반 무광으로 마감된 키들을 보면 값이 나가겠구나 싶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나기보단, 부드럽게 슥슥 조용하게 들어가는 느낌의 키감이다.
이 키보드를 전남편에게 선물 받은 지 약 10년이 지났다. 사무실에서 매일 유용하게 쓰는 물건이긴 하나, 전남편과의 기억 때문에 가끔 사무실 책상정리를 할 때 ‘그냥... 버려 버릴까?’를 항상 고민한다. 대개 고민 끝에 결국 그냥 쓰게 되어버리지만 말이다.
선물하기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그는 좀처럼 선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니가 이런 것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멘트는 그의 세상에 잘 없었다. 언젠가 그가 모임을 간다기에 ‘그럼 거기서 예쁜 머리끈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같은 부탁을 했을 때도 '난 니 물건을 사러 나가는 게 아냐’라는 말을 돌려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에게 기계식 키보드를 사주겠다 하니 놀랄 수밖에. 키보드라는 품목도 놀라웠지만 사 주는 이유가 더 놀라웠다. 기계식 키보드가 일반 키보드보다 비싸고 좋단다. 무슨 축이 어쩌고 설명을 한참을 해주더니 나에게 일할 때 좋을 거라고 사주겠다고 했다.
‘지금 쓰는 2만 원짜리 키보드도 괜찮은데 굳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나를 생각해서 사 준 첫 번째 물건이라 낯설면서도 좋았다. 하지만 ‘너한테 좋은 거니 나한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게 아닌데.’라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그와 헤어지고 나서 좀 시간이 흐른 후부터였다. 그와 함께 하는 집에서 나는 장롱과 같은 존재였다. 쓸모가 있지만 아무것도 느껴서는 안 되는 나. 504동 602호라는 집이 있는데 집이 없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나, 내 집에 나로 있게 되는데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막상 그가 처음으로 내게 선물한 키보드를 받아 써보니 좋았다. ‘진짜 좋네’라며 오랫동안 썼다. 다른 키보드로 바꾸려고도 생각해 봤지만 항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2026년이 된 지금도 사무실에서 잘 쓰고 있다.
관계가 끝나면 모든 물건들을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나였다. '물건이 무슨 죄야. 그냥 멀쩡하면 쓰는 거지’라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나에게 이 키보드는 여전히 예외로 취급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비 핑크에 부드러운 키감, 조용함까지. 그냥 쓱 하고 버리기엔 너무 내 물건 같은 전 남편의 키보드.
그래서 종종 ‘물건이 무슨 죄야’라며 슬며시 이 녀석에게 면죄부를 발행한다.
매년 1월이 되면 정리를 한다. 2년 동안 손대지 않았다면, 존재하는 줄 몰랐고, 그 물건 없어도 잘 살았다면 나눔을 하거나 버린다. 올해는 2년 규칙 외에 새로운 규칙 몇 개를 더했다. 물건을 봤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그 시절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안 괜찮은 것도 같이 버리는 걸로.
새로운 규칙 덕인지 이번에는 50리터 쓰레기봉투를 4개나 채웠다. 비워진 공간을 보며 흐뭇해진 김에, 좀 더 판을 키워 오래된 매트리스와 식탁을 버리고, 책상 상판도 교체했다. 그리고 이사하면서 드레스룸 구석에 처박아 뒀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전신거울도 망설임 없이 내놨다.
오래전, 그가 고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