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오지 않는 버스

by 낮을 헤엄치는 달

"뭐? 이걸로는 차를 빌려줄 수 없다고?"


처음으로 차를 외국에서 빌려보는지라, 국제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외국에서도 운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칠리아 카타니아 공항의 렌터카 사무실 직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스- 여기서 운전을 하려면, 너네 나라 운전면허증도 가져와야 해. 이탈리아 법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차를 빌려 줄 수 없어. 그래도 니 사정이 불쌍하니 당일 취소수수료는 받지 않을게"


렌터카 접수창구의 직원이 나의 누렁색 국제운전면허증을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섬 일주를 하며 좋은 건 몽땅 사서 때려 넣겠다고 집채만 한 캐리어를 끌고 왔는데, 괜스레 큰 캐리어가 갑자기 야속해졌다.


렌터카 사용이 불발되며,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우선 시내로 가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만원 버스를 타고 약간 달려 시내에 도착했다. 사람에 뒤엉켜 나도 우르르 버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휴양지 기분을 내겠다고 비싼 돈을 주고 산 새 라피아모자 속은 이미 땀범벅이었다.


스마트폰의 지도가 지금처럼 완벽히 길을 찾아주기 전에도, 나는 길눈이 꽤 밝은 편이라 가이드북에 딸린 종이 지도만으로도 길을 곧잘 찾았다. 어플로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좋았던 건, 지도를 보며 낯선 곳에서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였다.


손에 쥔 지도가 없으니 ‘저는 여행객입니다. 여긴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털어가셔도(?) 괜찮습니다’라고 써 붙인 형광조끼를 벗은 느낌이랄까. 스마트폰 덕분에 이젠 여행지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아닌, 적당한 이방인 정도 된 느낌.


그래서 공항버스에서 나와 같이 내린 현지인 모두 자기 갈 길을 찾아가는 동안, 나는 정류장에서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구글 지도면 다 되겠지 하고 맹신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곧 도착’이라고 알림이 뜬 버스는 안 도착, 3번째 전 정류장이라더니 안 도착,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알림 신청한 버스가 지나갔습니다’까지. 그렇게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땡볕 아래 한 시간이 흘렀다.


'...아오...시칠리아가 그렇게 좋다며? 그렇게 좋다며!!'


여행지를 추천해 준 사람을 원망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구글 지도의 도보 옵션을 보니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걸으면 20분이라는 안내가 보였다.


'그래. 그냥 걷자. 20kg이 뭐 대수겠어 바퀴 달린 거 그냥 끌자.'


그렇게 스마트폰의 도보경로를 확인하며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었다. 겨우 숙소에 도착한 뒤, 사태 수습을 위해 빠르게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


또 버스였다. 결국 원하던 일정대로 섬을 둘러보려면 버스로 시칠리아 남부의 카타니아에서 북쪽의 팔레르모까지 가야 했다. 버스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지만 허사. 결국 시외버스 정류장의 창구에 가볼 수밖에 없었다. 창구에 가보니 직원이 쓱 버스시간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그냥 그때 와서 타란다.


할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가 뚜벅이 기준으로 일정을 다시 잡았다. 불안했다. 어딜 가든 버스가 필요했다. 다음날부터 타고 내리는 버스 정류장의 시간표를 비장하게 찍었다.


하지만 시내버스는 버젓이 붙어 있는 시간표를 비웃듯 늦게 왔다. 이동시간 계산에 실패는 없다고 되뇌며,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시간표를, 길을 쳐다봤지만 버스는 역시나 그 시간에 오지 않는다. 또 오질 않는다.


'시계가, 시간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냥 앉아있자. 어디, 얼마나 늦는지 보자고.'


스마트폰 이전 시대의 여행객이 된 것 같았다.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겠으나,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왔다. ‘오겠지’라며 일단 믿고 정류장에 엉덩이를 붙여놓고, 버스정류장 시간표를 한 번 흘긋, 폰 시계를 한 번 흘긋.


몇 번의 시내 버스 이동을 하다보니 '역시 버스는 제 시간에는 안 오는 것'으로 결론 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할 수 있는건 버스가 올 때까지 정류장 주변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며칠을 보내고, 어느 날 유적지 구경을 마치고 나왔을 때, 시내버스가 정시에 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며, 또 시칠리아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에 막 합류한 다른 관광객들이 나에게 물었다.


“여기 버스 몇 시에 와? 버스 시간표 보면 20분 간격으로 있는 거 같은데?”


“응. 거기 시간표가 있지? 근데 난 지금 30분째 기다리고 있어. 이게 시칠리아 같아.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언젠간 오긴 와. 다행스럽게도 마피아가 버스는 안 타는 것 같더라고”


나의 실없는 농담에 그들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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