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수가 이곳이 남쪽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차창 밖 풍경이 바다에서 얕은 수풀들이 드문드문 심겨져 있는 땅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 도착했다.
말라가역에서 버스를 타고 에어비앤비에 도착해 짐을 두고는, 일단 거실의 TV부터 틀었다. 답답한 공기가 집안에 가득해 바로 에어컨을 틀었다. 오직 화면만 보고 무슨 얘기일까 맞춰보는 혼자만의 퀴즈쇼를 진행하다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캐리어를 살폈다.
'그래, 수영복이 있었지.'
몸을 담글 물이 있기만 하면 꼭 들어가는 사람이라 수영복은 내 여행의 필수품이다. 말라가에 도착한 건 9월 초. 한국에 있었다면 ‘곧 시원해지겠지?’는 생각이라도 할 텐데, 그때의 말라가에선 ‘당장 수영을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더웠다.
말라가 여행기를 검색하다 보니, 말라게따 해변에 바다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해, 냉큼 짐을 챙겼다.
수영복을 입고 위에 얇은 원피스를 더했다. 물에 젖어도 괜찮은 조리를 신고 길을 나섰다. 가방에 숙소의 키, 핸드폰, 얇은 수건을 챙겨 넣고 말라게따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제각각의 모습으로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바다수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 날씨라면 바닷물도 약간은 따뜻해질 법한데, 들어가 보니 몸에 살짝 소름이 돋을 만큼 바닷물이 오싹하게 차가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바다에 들어갔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들어갔다 나와서 몸을 따뜻하게 덥힌 뒤 다시 들어가기를 세 번쯤 했다.
수온도 수온이었지만, 누군가 해변에 둔 내 짐을 훔쳐가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오래 있기 어려웠다. 말라가는 100일짜리 긴 여행 초반에 방문한 도시였다. 초반인지라 폰과 숙소키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컸다.
그러다 보니 찰랑거리는 평온한 바다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짧게 물놀이를 하는 대신, 온갖 몸부림을 쳐보기로 했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자유형을 하다, 배영을 하다 잠수하고. 손을 휘휘 젓고, 발을 힘차게 차면서 쫄보의 수영을 계속했다. 몸부림과 함께 코로 귀로 목구멍으로 짭짤한 바닷물이 훅훅 들어갔다. '스페인의 바다도 이렇게 짠 걸 보니 바다는 바다네.'라며 몇 번을 아주 크게 기침을 컥컥해 대곤 다시 씩씩하게 물을 헤젓고 다녔다.
아무리 물이 좋다지만 스페인 남부까지 와서 바다수영을 하고, 추운데도 세 번이나 물에 뛰어들고, 낯선 바닷가에 와서 수영한 걸 티 내고 싶어 하는, 못 말리는 나. 그냥 그건 어쩔 수 없는 나였다.
수영을 마치고 축축한 수영복 위로, 가져온 원피스를 입었다. 수건을 어깨에 둘렀고, 머리는 헝클어진 미역처럼 내버려 뒀다. 조리를 신은 채 바닷가 입구의 수돗가에서 모래알을 물에 씻어내곤, 물 발자국과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헨젤과 그레텔이 빵 조각을 길에 남긴 것처럼 해변가 도로에 남겼다.
뜨거운 해가 젖은 원피스를 빠르게 말려줬다. 숙소로 걷다 보니 비로소 입안에 짠내가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작은 콜라를 사서, 한 번에 남김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누가 마지막으로 바다수영을 한 곳이 어디냐고 내게 묻는다면, ‘예. 스페인 남부의 해안가인데요. 장소만 들어보면 꽤 낭만이 있을 듯 하지만, 실은 짐을 도둑맞을까 봐 매우 쫄렸어요. 그래서 몸부림치다 먹은 바닷물이 한 트럭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엉뚱하다며 숙소에 돌아가는 내내 웃었다.
요새도 가끔 이 남쪽의 야자수를, 상의 탈의를 하고 태닝을 하는 말라게따 해변가의 할머니를, 상아색 대리석이 깔려있던 공원을 떠올린다.
피카소 박물관보다, 그 바다를. 그 입안에 가득 맴돌았던 짠맛을.
그리고 9월의 그 오싹했던 바다의 물기를 싹 말려준 강렬한 태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