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건강상의 이유로 1년간 휴직기간을 가졌다. 아프니까 그냥 편히 쉬면 좋으련만, 어느새 휴직은 회사원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해보는 시간으로 바뀌어있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1년 휴직을 마무리할 즈음, 100일간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미술관과 자연풍경을 보는 여행이었다.
그림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얕아 잘은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만나는 건 큰 축복과도 같다. 그런 그림을 만나면 공간과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끔은 그림이 나를 그 장면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다. 그림 속 사람들과 함께 강변에 앉아 햇살을 쪼이기도 하고, 그네를 타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달빛 아래 춤을 추는 사람이 돼 보기도 하고, 이런 장면엔 이런 음악이 나오면 좋겠다고 음악을 골라보기도 한다.
그림 안에서 충분히 놀았다면, 다시 관찰자로 돌아와서 질문을 시작한다. 무엇으로 그렸는지, 그림이 그려졌던 시대는 어땠는지,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그림이 그려지기 전과 후에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등 검색을 통해 알아본다.
다른 사람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표현 기법은 어땠는지도 세세히 살펴보고 탐색하면서 그림 감상에서 빠져나온다.
좋다고 생각되는 그림은 사진을 찍고, 그다음에 작가와 제목이 적힌 안내판도 찍어둔다. 그 그림을 왜, 무엇이, 어떻게 좋았는지 스스로 물어볼 정도가 되면, 그 그림을 언젠간 다시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초등학생인가 중학생 때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과서에 절규하는 사람이 마치 해골처럼 그려져 있어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어렸을 때는 그 그림이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까 싶어, 여행하는 중 뭉크의 절규를 볼 수 있는 노르웨이로 갔다.
가히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의 대표 작품이라 할 만했다. 너도나도 뭉크의 절규 그림 옆에서 양볼을 부여잡고 인증샷을 찍었다. 나도 그 인증샷 대열에 합류했다. 한 손으론 폰을 높이 치켜들고, 한 손으로 한쪽 볼을 부여잡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인증샷을 보니 곧 깔깔거릴 듯한 즐거움이 얼굴에 담겼다.
한 3시간에 걸쳐 미술관의 주요 작품들을 다 둘러보고, 박물관 숍에 가 기념품들을 구경한 뒤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숙소로 가기 전 왠지 나중에도 또 뭉크의 절규가 보고 싶어질 것 같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그림 앞으로 갔다.
'한번 더, 하나하나 내 방식대로 보자'
보다 보니 파스텔로 그려졌다는 게 눈에 띄었다.
'수많은 채색 기법 중 왜 파스텔이었을까. 유화였다면? 더 짙고 또렷한 절규가 됐을 텐데...'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왠지 파스텔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조금 차분해졌다. 양볼을 부여잡고 '나도 유명한 그림을 봤어'라는 기쁨이 묻은 인증샷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충격으로 일어난 슬픔이나 절망은 파스텔 가루처럼 섬세하고 잔잔하게, 곱지만 날카로운 유리가루처럼 사시사철 몸에 생채기를 내버리는 것이지.'
'아마 저 절규라는 것이 순간에 느껴진 거였어도, 어쩌면 하루 이틀 새 쓱 지나가버린 감정이 아니었겠지. 아마 다른 이에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테지. 본인의 몸에만 아주 가느다랗게 스쳐 지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망할 수밖에 없었겠지.'
석양도, 뒤로 스쳐 지나가는 웃는 이들과 전혀 다른 감각 속에서 괴로움에 소리치는 한 나약한 인간을. 그 인간의 절망의 순간을 잠깐이나마 숨죽여봤다.
'그리고 아마, 혼자였겠지. 저 순간만은. 소리치되 소리 낼 수 없던 어떤 밤이 있었겠지.'
말이 없는 그림을 눈으로 몇 번을 훑고 또 훑었다. 고운 파스텔화인데, 되려 나에겐 가장 거칠었다. 그 강렬함에 오래된 슬픔을 덮어보려 애써온 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또.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