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가 맘에 들면, 그곳의 사계절을 모두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방문했던 그때의 계절 말고 다른 계절을 그려본다면, 그건 그곳이 강렬하게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계절이라는 게 딱히 없는, 여름, 더 더운 여름, 비 오는 여름. 혹은, 겨울, 더 추운 겨울, 눈 오는 겨울만 있는 곳이더라도, 한 번 갔을 때 좋다고 생각했으면 언제 다시 가도 좋았다.
한국도 겨울이었지만, 눈이 잔뜩 쌓인 겨울이 괜스레 그리워서 그 주 토요일에 출발하는 홋카이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운 눈의 왕국으로 돌아가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다만, 이번엔 홋카이도가 아닌 일본 본섬 최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로 갔다. 설경을 유튜브에 계속 검색하다 보니 추천 영상이 나왔는데, 아오모리 주민들이 지붕에 쌓인 엄청난 눈을 치우는 걸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 눈 오는 것만 보면 되지. 새로운 동네도 가 보고.'
아오모리에 머무는 4일 내내 눈을 봤다. 첫날은 설탕 가루 같은 눈이, 둘째 날은 바람이 불면서 굵은 눈발이 날렸다. 셋째 날엔 더 많은 눈이 쌓여 발이 눈 속으로 푹푹 빠졌다. 마지막날엔 눈보라가 쳤다.
눈 때문에 숙소에서 나올 때마다 길의 모습이 달랐다. 사람 키보다 높이 쌓인 눈, 여러 대의 제설차,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녹았거나, 얼어붙은 길. 걸으면서 미끌미끌, 폭신폭신, 자박자박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도 매일 두꺼운 장갑을 끼고, 모자를 눌러쓰고 긴 부츠를 신은 사람들과 동네를 함께 걸었다. 한국에선 신기 부담스러웠던 종아리를 덮는 두꺼운 하얀 방한 부츠도 이곳에선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없으면 불편했을 거다. 여기에서 오래 산 사람이 신을 법한 신발을 신고 왔네 싶었다.
아오모리를 떠나는 마지막 날, 폭설과 강풍으로 신칸센역으로 가는 전차가 운행을 중단해 버스를 타야만 했다. 터미널에서 종이로 된 버스 시간표를 받아 들고 버스가 오기 전까지 정류장 앞 스타벅스에 앉아있기로 했다.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설산의 케이블카도, 산속의 온천도, 다다미가 깔린 숙소의 따듯한 물주전자도, 쇼핑몰에서 구한 작은 소품들도 좋았다며 여행을 되짚어 봤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눈 내리는 것을 지긋이 바라봤다.
한국 겨울 아침 풍경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평일 아침 출근시간대였지만,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은 눈보라에 모두 묻혔다.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 큰 캐리어를 끌고 버스 정류장을 서성이는 외국인 관광객들.
조심스럽게 정류장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버스들.
얼마간 창 밖을 바라보았을 때, 창 밖에 짧은 검정 장화를 신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큰 짐이 없는 걸로 봐선 영락없는 현지인이었다.
한쪽 어깨엔 꽤 큰 카메라를 메고 있었는데, 다른 쪽 주머니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버스 정류장에 눈이 휘몰아치는 장면을 찍었다. 작은 카메라로 한번 찍고, 다른 큰 카메라로 한번 더,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가서 뒤를 돈 다음 한번 더.
'난 눈이 보고 싶어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저 할아버지는 여기서 매일 낯선 겨울을 살고 있겠군.'
눈이 매일의 풍경을 다르게 만들어준다면, 내가 사는 동네도 매일이 달라 보이겠다 싶어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눈’ 자체엔 아마 익숙해졌을 텐데. 그걸 찍어 기록하려 한다니.
예전 사진을 취미로 배웠을 때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셔터를 누른다는 건, 순간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바꾼 거잖아요. 그러니까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사실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라는 말이.
눈이 만드는 풍경으로 동네의 모습이 매일같이 달라진다면 나는 저 할아버지 사진사처럼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셔터를 누를 수 있을까. 답이 초라했다. 요즘은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순간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더욱더 많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셔터를 누르는 것을 잊었다. 카메라를 꺼내 할아버지 사진사를 찍으려다 보니, 이미 그는 뒤 돌아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저런 장면은 사진으로 남길래야 남길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계속 아오모리의 단 하나로 기억하겠지. 눈보라가 쳐 앞이 채 보이지 않는 아오모리역 버스정류장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던 동네의 할아버지 사진사를.
여행을 하는 내내 이런저런 질문들의 답을 구하느라 복잡했는데 잠시 잊었다.
그가 나에게 순간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