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출장을 종종 간다. 잦은 출장으로 공항은 버스정류장처럼 익숙하다. 출장으로 머무는 공간과 계절, 시간대와 사람이 모두 바뀌어도 이제는 그저 '일'이려니 생각한다.
출장 중엔 현지의 일과 한국의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해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야 할 때가 많다. '출장이라고 해도 해외로 가신다니 부럽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24시간 중 20시간에 가깝게 일만 하니까요. 부러워만 할 건 아니에요'라고 말하곤 한다.
재작년, 우연찮게 출장 갈 기회가 생겨 2주간 중남미 나라 네 군데를 방문하게 됐다. 장거리 비행기 두 번, 새벽 비행기 세 번, 밤 비행기 한 번. 일정표를 보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멀리 간 김에 다른 데도 한 군데 더 가보지?’라는 말이 몇 번이나 덧붙은 결과였다.
첫 번째 도착지인 파나마 공항에서부터 꼬였다. 수하물이 나오지 않았다. 항공사에 문의하니 내 짐이 환승지인 애틀랜타에 남아 있단다. 항공사 직원에게 내 짐을 찾으면 호텔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공항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주재원을 만나 출장 일정을 시작했다.
검은 반팔티, 검은 7부 바지, 검은 운동화, 검은 양말. 그리고 작은 검정 노트북 캐리어 하나.
2주짜리 출장치고는 지나치게 단촐한 차림이었다. 주재원은 애틀랜타 환승을 할 때 이런 일이 종종 있다며, 지금 옷차림으로도 일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그 말을 믿고 그 꼬라지로 업무도 하고, 법인장님과의 식사 자리에도 참석해야 했다. 몇 날을 그렇게 버텼다.
35도를 웃도는 파나마의 덥고 습한 날씨 탓에, 일과를 마치면 몸은 끈적였고 옷은 땀에 절어 눅눅했다. 입을 옷이 그거 달랑 하나라, 호텔 세탁 서비스를 맡기고, 옷이 돌아오길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호텔로 돌아와 손빨래를 했다.
출장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꽤 좋아하는 편이다. 모르는 나라의 낯선 공항 냄새를 맡으면, 그 순간만큼은 회사라는 견고한 유리온실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파나마까지 와서 손빨래를 할 줄이야.
바로 다음날 그 옷을 입고 일을 해야 했기에, 손빨래를 마친 뒤 ‘내일도 잘 해내야지’라고 다짐하며 다림질까지 바싹해뒀다. 그렇게 짐이 도착하기 전까지, 손빨래는 파나마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 됐다.
사실, 첫날엔 이게 뭔가 싶어 짜증이 났다.
오래전 수하물 지연으로 출장지에서 급히 정장을 산 뒤로, 노트북 캐리어엔 꼭 정장 한 벌을 챙겨 다녔는데 그 일을 잊고 방심했다는 자책이 은근슬쩍 따라붙었다. 첫 출장지부터 에피소드가 많다며 투덜댔다.
그런데 두 번째 날부터는 투덜거림도, 짜증도, 자책도 없었다.
매일 저녁의 손빨래가 낯선 곳에서의 하루를 보낸 나를 위로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와 똑같은, 하지만 호텔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남은 검은 옷이 덩그러니 옷장에 걸려 있었다.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손빨래를 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문득 한국 집의 옷장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옷과, 남이 본다는 이유로 갖춰 입는 여러 가지 옷들이 뒤섞여 있는, 사연이 가득한 옷장이.
‘이 검은색 옷을 매일 빨아서 입는다면 한국에서도 단벌로도 여름을 날 수 있겠네. 스티브 잡스처럼 나도 시그니처 옷 같은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 사연 많은 옷장도 가벼워지겠지?’라고 생각하던 중, 호텔 프런트데스크에서 짐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유명한 사람은 되지 못할 모양이었다. 짐이 도착했다는 말에, 냉큼 호텔 프런트로 내려갔다. 다음 일정인 콜롬비아에 도착하기 전, 이 경건한 검은색들과 이별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캐리어에서 곧장 깨끗한 옷을 한 벌 꺼내 입었다. 매일같이 빨아 입던 검은 옷은 캐리어 안에 잘 개어 넣었다. 사연이 생겨버렸기에, 한국 집의 옷장 안으로 데려갈 자격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