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나의 혈통, 단일한 품종을 자랑하는 어떤 문장들을 읽을 때면 늘 마뜩지 않은 괴리감을 느끼곤 하는데 아마도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복잡한 이종의 요소들이 순혈주의와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일이란 무릇 섞이고, 뒤엉키게 마련이니 '순수함'에 대한 찬사가 '희소함'에 대한 동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별종에 가까운 것이라 되려 거북함을 느끼는 것이다. 오직 홀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얼마 전 이직하는 과정에서 이력과 경력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크게 건너뛰는 변화를 여러 차례 시도하면서 복잡 다양한 요소들이 뒤죽박죽 섞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잡종(雜種)의 요소들이 혼재되었으니 혼종(混種)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영어로는 hybrid라고 쓸 수 있으니 이 또한 다채롭구나 하는 경탄의 마음마저 들게 된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경력의 건너뜀과 이주의 과정을 큰 항목만 추려서 열거하면 이렇다.
하나, 사원에서 리더로
둘, 회사원에서 사업가로 (다시 회사원으로)
셋, 서울에서 제주로 (다시 서울로)
넷, 오프라인 기업에서 이커머스 기업으로
다섯,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회사가 결정한 승진만 제외하면 대부분 스스로 결정했으니 온전히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변화의 과정 혹은 결과에서 꽤 많은 후회와 부정을 겪곤 했다. 괜한 짓을 해서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던 것이다. 평온한 생활은 몸과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행복감을 주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스스로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래도 되나 싶어 화들짝 놀라곤 했다. 조금 편안해도 될 텐데,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 스스로 좌불안석이 되고 만다. 편안함이란 성장이 아닌 정체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조바심이 스멀스멀 자라나 종국엔 머릿속을 온통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시선이 오늘에 있지 않고 내일에 있으니, 뜬구름에 발을 딛고 있으니 오죽했으랴.
지난달 한식, 어머니를 모신 산소에 다녀오면서 내내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귓가에 머물렀다.
"인생 별거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
아마도 늘 먼 곳만 바라보는 아들이 안쓰러워서, 그리고 역시나 그렇게 살아온 당신의 삶이 안쓰러워서 하신 말씀이리라 짐작한다. 늘 앞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았는데 행복에 닿지 않으니 쓰린 마음을 어찌 달랠지...
꽤 긴 시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나의 건너뜀, 혹은 이주, 거창하게는 디아스포라의 과정은 후회와 좌절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과정을 되돌아보니 어쩌면 재미있는 모험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반 스푼 정도 하게 된다. 마치 취한 사람처럼 앞만 노려보며 달리다 보니 뒤를 돌아보는 시간은 귀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모험은 꽤 낭만적이었을 테고, 나는 여전히 모험 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 사원에서 리더로
; 10년 차가 되었을 때 작은 파트의 리더가 되었는데, 그때의 생경한 느낌, 어색함,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은 아직도 묵직하게 남아있다. 당시 나는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진급했는데 그때 선배가 해준 조언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
'과장으로 진급하는 대리들은 과차장의 관점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넌 일 잘하는 대리일 뿐이고'.
관점의 변화, 즉 준비 없이 그저 때가 되어 진급한 결과는 참혹했다. 나는 그저 사람 좋은 과장이었고, 결국 직원들과 친해지지도 못했다. 회사의 중간 리더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성과, 특히 팀워크에 의한 성과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둘, 회사원에서 사업가로 (다시 회사원으로)
; 창업을 했지만 망했다. 다시 회사원이 되었다. 실력과 운, 사람. 세 가지 요소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맞물려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실력이다.
일을 성사시키는 몰입력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모이고, 쌓여 규모를 이루면 그제야 운도 따라온다. 나는 회사원으로 돌아와 작은 성공을 이따금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셋, 서울에서 제주로 (다시 서울로)
;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제주의 주택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은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장아장 마당을 걷거나 깡충깡충 뛰곤 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 아이들은 요새 학교와 학원을 오간다. 가끔 공원에 가고, 동네를 산책한다. 전원이냐 도시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넷, 오프라인 기업에서 이커머스 기업으로 ;
회사의 업은 직원들의 업을 규정한다. 나의 직업경력은 2002년, 백화점에서 출발한다. 1993년에 출범하여 이제 막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할인점이 소매업을 장악하면서 백화점 업계가 생존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시기였다. 오프라인 리테일러에서 오픈마켓의 MD로 이직한 때는 2015년으로 쿠팡이 로켓배송의 시동을 걸던 시기이고, 소매업 전체적으로는 본격적인 이커머스 전이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당시 내가 일했던 백화점과 오픈마켓은 기득권을 뺏긴 채 선두를 쫓아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늘 경쟁자를 바라보며 일했다. 커머스 업(業)에서 고객이 아닌 경쟁자에게 시선을 빼앗긴다는 것은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과는 명확하게 나타났다. 지금 소매업을 장악한 기업들이 무엇을 바라보며 움직였는지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일까? 정리해보면 매우 간단하다. 시선이 엉뚱한 데 있어서 놓치고 있을 뿐.
- 오프라인 리테일 : Location + MD ; MD_상품기획 및 운영의 형태는 업태(format)별로 다름
- e커머스 : 가격 + 구색 + 배송 (Everyday Low Price + Everything + Quick& Right Time Delivery)
다섯,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기회는 늘 위험과 함께 온다. 하지만 감내할 수 있는 위험의 크기가 곧 기회의 크기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위험의 관리 가능 여부가 곧 기획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안정과 보장된 지위를 대기업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스타트업에 와서 보니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대기업에 있으나, 스타트업에 있으나 도전하지 않으면 기회는 없으며, 위험을 관리하는 능력을 내재하지 못했다면 기회는 위기로 바뀔 것이다.
백영옥,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p27) 우연을 기다리는 힘, 시간을 견디는 힘. (~)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