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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큐리 May 08. 2022

20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사실

나는 매일 상품을 본다. 수백 개씩 본다. 단순하게는 상품의 이름이나 이미지로 보고, 순위를 매긴 리스트로 보며, 경쟁사의 상품들을 비교하며 보기도 한다. 그렇게 수백 개의 상품을 훑어보는가 하면, 상품 상세페이지의 구성, 옵션별 가격, 판매량, 구매자의 리뷰까지 세세하게 보기도 한다. 지칠 것 같다고 생각할 텐데, 정말 지친다. 사지도 않을 상품을 그렇게 세세하게 훑어보고 있자니 당연히 지친다. 


나는 MD, 그러니까 '상품기획자'라고 번역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사회생활 초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간 직업생활을 했으니 7부 능선은 넘은 셈이다. 산에 오를 때, 7부 능선을 넘는다는 것은 아마도 어깨 근처에 도달하여 정상을 눈앞에 두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직업의 여정도 그러하다면 나는 이제 막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적어도 방향 정도는 알려줄 만큼의 길잡이 노릇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며 평이한 이야기뿐이다.


그저 꾸준히 발걸음을 디뎌야 한다는 것.
꾸준히 상품을 보고, 또 봐야 한다는 것.
그것뿐이다.


나는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MD라는 직업의 성공에는 '반드시', 창의력이 크게 작용한다고 믿었더랬다. 하지만 그건 내 바램일 뿐이었다. 나의  일이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혹은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창의적이라 착각한 공상보다 훨씬 필요한 것은 언제나, 성실함과 인내심이었다.

 

곰국을 끓인다고 가정해보자. 약한 불에 오래 끓여내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아야 비로소, 곰국이 완성된다. 완성된 곰국에 잘 썬 파 한 줌과 소금 한 꼬집 가미하맛을 증폭시킬 수 있으되 본질의 완성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기껏 예를 들어도 곰국이라니... 고리타분함의 진정성만 봐도 창의력과의 거리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의 일은 그런 것이다.

세상은 창의적 인간을 경배하며, 기발한 착상에 찬사를 보내지만, 더 큰 경배와 박수는 바로 성실함과 인내심에 보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20년이나 되어서야 산의 어깨에 올라 뒤를 돌아보게 된, 우매한 자인 나는 오늘도 상품을 본다. 훑어서도 보고, 자세하게도 보며, 보고 들은 바 내용을 놓고 팀원들과 토론하고 토론하고, 토론한다.


조금 지치지만 적어도 답이 있다는 점에서 불안하지는 않다.


p.s.

졸지에 쓸모없는 처지로 전락한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도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사실 '쓸모없는 창의성'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홀로 존재하는 때로 한정된다. 창의성은 레고 블록과 같아서, 다른 블록들과 합쳐지면 비로소 빛을 발휘한다. 짝을 이루어야 하는 블록들의 이름은 책임감, 인내심, 도전, 몰입이다. 창의성의 시작은 그저 단순한 '발상'이곤 해서, 이어 붙이거나 시도해보고, 성과를  내기까지 끈질기게 도전해야 한다. 무책임한 발상을 툭 던지는 것만으로는 창의성이 완성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고리타분함의 진정성을 또다시 발휘하여, 명언으로 사족을 달아본다.(어쩌면 이 말 한 마디면 끝날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영웅은 크나큰 역경에도 인내하고 견뎌낼 힘을 추구하는 평범한 개인이다

(크리스토퍼 리브 ; 슈퍼맨으로 더 유명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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