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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Nov 20. 2020

지구 끝의 온실, 그곳에는..

스포는 되도록 자제했습니다만.

 

밀리의 서재 종이책 정기구독자로 지내다 보면 다른 곳에는 없는 신간 종이책을 받아볼 기회가 종종 있다.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의 밀리의 서재판도 그런 경우다. 이 책이 11월 중 집으로 배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책만큼은 꼭 기다렸다가 종이책으로 읽어야지라고 결심했었다. 그 결심은 며칠 내에 어김없이 무너졌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전자책을 뒤적여 보았던 것이 실수였다. 첫 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독자에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모른다. 김초엽 작가는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그런 작가다.

 이 책은 액자와 같은 다소 복잡한 구성으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처음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미래의 한국에 사는 과학자 '아영'이다. 머지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지구에 '더스트'라는 재앙이 발생하여 세계 인구의 87퍼센트가 희생되는 극한의 시대가 지나간지 70년이 되는 해가 아영이 살고 있는 시대다.

 더스트 시대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먼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스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돔 시티를 건설해 그 안에서 생존을 이어나갔다. 한정된 공간 내에 한정된 자원만이 존재하는 그곳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또 다른 지옥과도 같았다. 결국 약한 자들은 돔 시티 밖으로 밀려 나왔고, 그들은 돔 밖에서 살 길을 구해야만 했다. 더스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가장 약한 자들이 모여 사는 한 마을이 있었다.

 결국 더스트는 종식되었고 인류는 다시 후손을 낳아 더스트를 모르는 세대가 태어났다. 식물학자 아영은 '모스바나'라고 불리는 야생 덩굴식물의 이상증식 현상을 연구하게 된다. 연구를 계속하던 중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 해답을 알고 있을 만한 자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인터뷰를 통해 아영은 커다란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어간다. 더스트 시대의 실상과, 약한 자들이 모여 살던 은밀한 마을의 존재, 나아가 그 배경에 관한 비밀까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목했던 점은, 늘 그렇듯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먼 세상의 약한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이 이야기에도 힘없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거친 시대일수록 보호벽은 무력하기 마련이다. 이성이나 도덕은 생존의 본능 앞에서 무너진다. 그녀들은 주저앉아 당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싸움을 이끌어나간다. 그녀들을 지키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결국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소설은 각박하고 힘든 상황에서 서로를 아끼고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록 길게 이어지지 못한 평화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함께했던 시절을 각자의 자리에서 두고두고 그리워했음을 여러 단서로 남겨두며, 작가는 마지막 장까지 탄탄한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춰 준다.

 비단 더스트와 같은 종말의 시대에서만 인류가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세먼지의 증가와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을 목격하고 있는 현세대 역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절망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좌절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가치는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때 결국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책 전반에 담겨 있었다. 비록 아무도 그 수고를 몰라줄지라도, 믿음과 희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싹을 틔워 나갈 것이라고.




“저는 진실이 뭔지 몰라요. 지수 씨가 정말로 뭘 한 건지는 알 수 없겠죠. 당신의 마음이 실제로 유도된 것인지는요. 어쨌든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예요. 그렇게 오랜 시간 변하지 않았던 마음은, 정말로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

정적 속에서 나오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모두 약속을 지켰군요.
떠나서도 잊지 않은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나오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점들의 이름을.



훈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닫았다. 그간 읽어온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이야기 속에 다 담기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여운이 많이 남아 그걸 곱씹고 또 곱씹었었다. 그에 비해 장편인 이번 소설은 작가가 긴 이야기 속에서 군데군데 심어놓은 장치들을 책장을 되돌려 다시 음미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저녁에 읽기 시작한 책을 놓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장까지 본 후 새벽에 잠이 들었다. 숨 쉬듯 쉽게 읽히는 가독성과, 다음 전개가 궁금해 차마 책을 덮지 못하는 스토리의 탄탄함, 게다가 예측하지 못할 이야기로 이끄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책이었다.

 다음 책이 더 기대되는 작가,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에서 과연 누구를 만날지 궁금하다면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 바란다. 모든 것은 상상, 그 이상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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