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름을 짓다.
해가 진 후의 잔광, 빛의 여운.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팔려고 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사업자등록'이다. 중고 물건을 파는 개인 간의 거래가 아닌 이상, 사업자로 등록해서 소득을 신고하면 세금을 걷어가는 국가의 시스템 내로 들어가야 한다. 주변에 자영업이나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고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사업자등록 관련 업무는 해본 적이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네이버와 유튜브에서 조금 발품을 파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국세청 어플에 접속하면 간단히 등록할 수 있다길래 어플을 실행했다. 사업자등록 신청 메뉴를 누르자 첫 줄부터 숨이 턱 막혔다. '상호'를 등록해야 했다. 문득 대학 시절 들었던 상법 수업시간이 생각났다. '상호'의 개념에 대해 배웠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상호는 기업의 이름이다. 장사를 하려면 가장 먼저, 이름부터 지어야 한다. 이름이라.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사업자등록 신청 창을 조용히 닫았다.
난생처음으로 이메일 아이디를 만들었을 때, 그 옛날 PC통신 대화방의 대화명을 만들던 때가 생각났다. 내 가게의 이름은 무엇으로 지어야 하나. 팔찌를 만들어 팔 예정이니 팔찌와 관련된 이름을 떠올렸다. 검색을 좀 해보니 좀 괜찮다는 이름들은 모두 누군가가 쓰고 있었다. 어차피 요즘은 브랜드 시대라니, 팔찌와는 좀 무관하더라도 그냥 좋아하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세상의 수많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도 문득 떠오른 것은, 나는 해가 지고 난 후의 어스름한 하늘, 깜깜해지기 직전의 군청색의 하늘을 좋아했다. 가느다란 초승달이라도 떠있으면 더 좋았다. 남아있는 빛의 여운. 새벽의 여명과는 또 다른 어감의 단어를 찾았다. 적합한 영어 단어가 있었다.
afterglow.
1.(해가 진 후의) 잔광
2.(기분 좋은) 여운
그렇게 브랜드의 이름이 정해졌다.
해 질 녘의 조금은 쓸쓸한, 하지만 남아있는 빛 덕분에 앞을 분간할 수 있는 시간. 낮 동안의 행복했던 순간의 잔상이 남아있는 짧은 순간을 의미했다. 누가 되든, 나에게 물건을 산 사람에게 이 이름처럼 기분 좋은 여운이 전해지면 좋겠다. 행복했던 추억의 잔상이 엮인 팔찌의 구슬마다, 꼬여진 실마다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사업자등록 신청 홈페이지로 가서 상호를 기재하고 몇 가지를 더 적어 등록을 마쳤다. 한글로 애프터글로우. 업종은 도소매업 중 통신판매업이다. 더 구체적인 분류는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 팔찌를 팔다 안되면 뭐라도 내다 팔면 되는 것이다.
며칠 뒤 국세청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신청한 사업자 등록이 잘 접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사업자등록증 번호가 나왔고, 사업주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진짜 사업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일단 샘플을 많이 제작해야 하고, 사진도 구색을 갖추어 찍어야 한다.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오픈하기 위한 서류 작업도 많이 남았다. 마케팅을 위해 SNS 팔로워도 늘려야 한다.
그래도 이름이 생기고, 사업자등록을 덜컥해버리니 정말로 무언가 시작된 느낌이다. 구체적인 문서(사업자등록증)가 눈에 보이니 모처럼 마음먹은 일이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게 된다. 아무튼 나는 이제 사장님이고 대표가 되었다. 그것이 1인 기업이건 구멍가게 건 말이다.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떼었는데도 숨이 차고 설렌다. 뭐든지 새로운 시작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