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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Aug 03. 2023

당신의 험난한 외출을 응원합니다.

단 5분만 눈을 감고 길거리를 걸어본다면.


 토요일 한낮의 노원역은 복잡하다 못해 어지러웠다.
하얀 지팡이를 톡톡 두드리며 걷던 청년은 자동차 소리가 다가오자 흠칫 멈춰 섰다. 사람도 차도 섞여 다니는 혼잡한 거리에서 나와 그의 거리는 불과 5미터였다.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혼자 걸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큰 아이 봄이가 수업을 마치고 슬슬 엄마가 오기를 기다릴 거다. 둘째 별이는 주말이라 아빠랑 수영 수업에 갔다. 봄이가 수업받고 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려던 차에 그와 마주쳤다.

마음속으로 다섯 정도 세는 동안 몇 번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그에게 다가갔다. 스무 살을 갓 넘겼을 것 같았다. 신호등이 없는 길을 건너는 것은
시각장애가 있는 그 친구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 길을 건너가야 하나요?
아마도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일 것이다.
- 여긴 신호등이 없어요. 나랑 같이 가요.
우리의 짧은 동행이 시작되었다.

- 아는 길은 잘 다닐 수 있는데. 어제 이 동네로 놀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지하철역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을까요.

-신호등이 없는 길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해요. 혼자는 무리예요. 나랑 같이 가요. 지하철 역까지.

 활동보조인은 같이 안 다녀도 되나요?

-저 혼자 다녀요. 아빠는 저에게 너 혼자 해봐야 한다고
평소에 늘 말해요.

- 멋지다. 진짜 멋지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들도 특수학교에 다녀요. 혼자 다닐 수 있고. 이렇게 얘기도 잘하고. 정말 잘하고 있는 거예요.
난 엄청 부러운걸요.
여기서 우회전. 10m쯤 가서 좌회전. 계단은 다섯 개예요. 하나 둘 셋넷다섯..

우리는 지하철역의 긴 에스컬레이터를 함께 타고 내려왔다. 그가 혼자서는 타기 힘들었을 속도의
에스컬레이터였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는 너무도 멀고, 낮 1시의 기온은 33도. 봄이가 좀 기다리더라도 그와 같이 오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승차카드를 찍는 곳까지는 그럭저럭 왔다. 하지만
노원역 7호선에서 4호선까지 환승거리는 무려 10분도 더 걸리고, 에스컬레이터 2개에 계단까지 있다. 역 안으로 같이 들어가 승강장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봄이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지하철역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흔쾌히 응해주었다. 4호선을 타고 서울역까지 간다던데. 일단 지하철을 타면 잘 갈 수 있을까.

 낯선 노원역까지 놀러 온 패기 있는 청년이니까. 주눅 하나 들지 않고 밝게 얘기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의 교통 현실은 장애인에게 여전히 가혹하지만, 용기 있는 그의 험난한 외출을 응원하고 싶었다.

-잘 가요. 너무 더웠죠. 여기서부터 이분이 승강장까지 함께 가줄 거예요. 오늘 아주 잘하고 있어요.
안녕.

많은 위험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밝게 인사하고 그를 혼자 보내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금만 더 안전하면 좋을 텐데. 모든 길에 신호등이 있고, 보행신호에 알림음을 내주고.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조금 더 가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조금 더 마음 편히 잘 가란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으로, 모르는 동네로 서슴없이 나오는 그와 같은 친구들을 응원한다. 그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다.


#시각장애 #교통약자 #외출 #용기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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