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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베이스볼 May 03. 2017

그는 누구일까요




소년의 중2 겨울 방학은 어느 때보다 신이 났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야구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160cm도 되지 않는 작은 키때문에 매번 거절당했는데 드디어 입부 기회가 왔습니다.




늦은 시작


운동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였습니다. 또래의 중3 선수들보다 실력도 체구도 한참 뒤쳐졌습니다. 소년은 기초부터 하나씩 배워 나갔습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얼마나 하고 싶었던 야구였나요. 봄이 지나고 고교 진학을 고민하는 시기, 소년은 야구 선수로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인근 고교의 야구부로 진학하는데 성공합니다. 불과 야구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입학 후 야구부 첫 소집 날, 감독은 소년을 교실로 돌려 보냅니다. 야구부에서 잘린 거였죠. 형편없는 실력을 보고 선수로 뛰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날 밤, 소년은 펑펑 울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서러운 날이 또 올까 싶습니다.







어둠 속 동아줄


다음 날, 부은 눈으로 집을 나선 소년은 학교 대신 다른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반항심은 아닌데 그냥 학교로 가기 싫었습니다. 야구를 계속 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부모님께는 잘렸다는 말을 하지 못 해 일부러 유니폼에 흙탕물을 묻혀 집으로 가져가고는 하였습니다.


무단 결석한 지 일주일 째, 그 날은 가까운 대학교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 곳에서 훈련 중인 고교 야구부를 보았습니다. 올해 처음 생겼다는 지역 신생 팀이었습니다. 명문의 명맥을 이어오던 소년의 학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팀이었죠. 아직 학교에 연습할 여건이 갖추어 지지 않아 대학 야구장을 빌려 쓰는 중이었습니다.


소년은 훈련 중인 야구부로 다가가서 사정을 말하고 야구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코치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소년은 고교 1학년 때 특기자 전형으로 전학을 갑니다. 





사라진 야구부


개교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는 학교였습니다. 고교 야구 붐에 맞추어 야구부를 창단하였지만 그다지 학교 측 지원을 받지는 못 하였습니다. 결국 야구부는 소년의 졸업과 동시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소년의 모교 팀이 3년의 짧은 역사 동안 올린 성적은 봉황대기 32강 진출이 유일하였습니다.


소년의 고3 겨울 방학은 잔인하여서 춥숩니다. 고교 야구부 성적이 없다 보니 대학 진학에도 실패하였고 프로 구단 지명도 받지 못 하였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해서 겨우 시작한 야구인데, 소년은 또 다시 눈 앞이 캄캄합니다.





소년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누구인지 조금은 짐작이 가십니까.








배트맨의 탄생



소년은 바로 90년대 OB베어스의 배트맨, 김상진 투수입니다 (현 삼성라이온스 코치).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 뒤늦게 마산동중에서 학생 선수로 시작한 그는 졸업 후 마산상고(용마고)로 진학합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서 쫓겨나고 그 해에 새로 생긴 청강고(마산제일고) 야구부로 전학을 갑니다. 이 마저도 재정난과 운영 미숙을 이유로 3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고교 야구부 성적으로는 대학 진학도 어림 없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야구하러 오라고 그를 부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향하여 스스로 한 발걸음 씩 내딛으며 움직였습니다. 



당시 OB베어스는 온화한 기후를 찾아 경남 창원에서 동계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김상진은 OB베어스의 훈련 캠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테스트를 거쳐 1989년에 OB베어스의 훈련 보조로 들어갑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배팅볼 투수였습니다. 타자들의 배팅 연습 상대를 해 주는 것이었지요. 실제 경기에 투입되는 포지션이 아니었으나, 그는 이를 악 물고 버티며 다가 올 찬스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듬 해, 그는 OB베어스에게 정식으로 지명을 받습니다. 야구하러 오라, 는 콜. 마침내 프로 야구 선수라는 타이틀을 달게 됩니다.









비상하는 배트맨


입단 직후 미국의 교육 리그에 참가하는 그는 자신만의 투구 폼을 만들었습니다. 팔 스윙과 밸런스가 잡히면서 투구가 완성되자 자신감도 함께 붙었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91년에 OB베어스의 마운드 사정은 심각하였습니다. 개막 후 한 달 가량이 흘러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OB는 2군에 있던 김상진을 콜업합니다. 



1군 무대 데뷔 첫 해에 김상진이 세운 기록은 10승 6패 1세이브. 두 자릿 수 승수를 기록한 그는 실력과 인기가 함께 급부상하며 OB베어스 간판 투수가 되었습니다. 김상진의 이름이 가장 빛나던 최고의 해는 1995년. 한 해 동안 그는 마운드에서 무려 17승을 달성하였고, 그 중에 완봉승은 여덟 차례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 입어 OB베어스는 한국시리즈로 진출합니다. 



대망의 한국시리즈 1차전, OB베어스의 첫 선발 투수는 에이스 김 상 진. 오직 야구가 하고 싶어서 작은 키에 울먹이던 어린 소년은 어느 덧 잠실 야구장 한 가운데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그를 향한 힘찬 응원과 기대가 가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시련은 소년을 흔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릎 털고 일어서는 다부진 노력이 이룩한 영광이었습니다. 








https://youtu.be/sL-UAFAzAcs

1995년 OB 김상진의 한 경기 12이닝 17K

(영상) 1995년 5월 23일, OB베어스의 김상진 한 경기 17탈삼진 주요 장면 (vs한화)

참고로 그가 첫 번째 선발로 등장하였던 95시즌 한국시리즈는 OB베어스의 우승으로 마감하였다.





 


* 2015년 12월 11일에 개인 sns에 남긴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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