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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베이스볼 Feb 19. 2016

마산 야구의 힘(2)





전 편에 이어서 나갑니다.

마산 야구의 힘(1편)  https://brunch.co.kr/@retro/32









마산합포구청 일대는 예부터 주거 지역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바다와 인접하여 항구와 어시장이 생겨나고 마산의 중심 상권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이 곳은 북으로는 무학산, 남으로는 마산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산 문화동에서 자산동으로 이어지는 좁은 이차선 도로를 마산 사람들은 산복도로라고 불렀습니다. 도로를 따라서 마산을 대표하는 중고교가 줄지어 있기 때문에 아침 등교 버스에는 늘 교복 차림의 학생들로 북적였습니다. 교실에서 창문을 열면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와 인접하면서도 산자락에 위치한 지형 때문이었습니다. 공업용수로 오염 몸살을 앓던 마산 앞바다도 아침이면 수면에 햇살이 반사되어 다이아몬드를 쏟아부은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습니다.




일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었다면 무학산을 한 번 씩 오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마산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무학산은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진달래 군락이 화려하고 수목이 수려하기로 유명합니다. 해발 731.4m 높이로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탁월합니다. 화창한 날이면 주택과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선 마산과 창원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커다란 화물선이 마산만을 지나 남해를 가로지르며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982년은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한 해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기념할만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마산 야구장이 개장한 해입니다.




그 해 경남에서는 제 63회 전국 체육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산종합운동장 내에 야구장을 준공한 것입니다. 마산에서 언제 프로 야구 경기가 처음 열렸는지 기억하십니까? 82년 9월 26일, 롯데 자이언츠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였습니다. 개장 기념 경기를 치렀죠. 개장 당시 마산 야구장의 좌석은 1만 석 정도로 전국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였습니다. 완공 초기에는 조명 시설이 없어서 주간에만 경기를 진행하였는데  이듬해에 조명탑을 설치하고 야간에도 경기가 가능하게 되었죠.




마산과 프로 야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89년에는 프로 야구단 유치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마산의 토종 기업인 한일합섬이 KBO에 창단 희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는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그때에 창단한 팀이 전북을 연고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였습니다. 한편 마산 구장은 롯데 자이언츠의 제2의 홈구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마산 사람들은 롯데의 야구와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 프로 팀들은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스프링캠프를 마련하였습니다. MBC 청룡, OB 베어스 등이 따뜻한 남쪽 지역을 찾아 마산과 창원, 진해 일대에서 동절기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어느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학창 시절에 OB 베어스의 훈련장을 찾아가서 포수 마스크를 쓴 김경문 선수를 보고 설레던 기억이 있다고. 시즌이 종료되어도 마산 사람들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무학산 자락 아래에서 야구하던 마산 출신 고교생들은 졸업 후 대학과 프로에서도 활약하였습니다. 주로 영남대와 동아대 야구부로 진학하였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프로 선수로 뛰었죠. 유두열, 한문연, 전준호, 공필성 등 현역 시절부터  야구팬들에게 사랑받았던 선수들이었습니다. 90년대에 마산상고와 마산고는 야구 명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허나 자신의 기량을 꾸준히 선보이는 선수는 있었습니다. 제46회 화랑대기에서 MVP를 수상한 채종범은 당시 준결승과 결승에서 극적 홈런을 기록하며 마산고에게 사상 첫 우승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듬해 제49회 황금사자기에선 2학년이던 신명철이 4강전에서 홈런을 날려 팀이 결승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고교 시절에 나란히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각자 프로 무대를 돌고 돌아 2014년에 kt 위즈에서 코치와 선수로 다시 조우하였습니다.




고교 야구가 점차 엘리트 체육인 양성 시스템으로 전향되면서 마산에서는 학생 선수의 진학률이 떨어졌습니다. 스포츠는 결과로 평가되기 때문에, 즉 고교 야구부의 성적이 대학 진학이나 프로팀 입단 등 선수 개인의 진로와 직결되기 때문에 기량이 우수한 선수는 더 나은 환경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마산 양덕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박정준은 중학생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경남고 야구부로 진학한 그는 공격과 수비, 주루에 모두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고교 야구의 이치로라는 별명이 붙었죠. 아마추어 관계자들은 03학번 최고 타자라면 예외 없이 박정준을 손꼽았습니다. 당연히 프로에서도 조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03년도 신인지명회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박정준을 1차 지명하였습니다. 투수가 아닌 외야수를 1차 지명하는 건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탐이 나는 선수였습니다.











기나긴 시간을 달려 우리는 마침내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2010년 겨울, KBO는 대한민국 아홉 번째 프로 야구단을 창단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신규 구단의 연고지는 경상남도 창원이었습니다. 옛 마산이 머무는 그 도시입니다.




그 해 7월, 기존의 마산과 창원 그리고 진해는 통합하여 새로운 창원시로 출범하였습니다. 3개 시는 이전부터 근거리 동일 생활권이었기 때문에 통합 이후에도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적었습니다. 하지만 통합 시의 명칭을 그대로 창원이라고 고수하다 보니 사적인 자리는 물론 언론에서도 언제나 '새 창원시' 혹은 '통합 창원시'라고 지칭해야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었죠. 마냥 안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질감을 해소할 수단으로 창원시는 스포츠를 떠올렸습니다. 마침 베이징올림픽,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야구의 인기가 치솟던 시기였습니다. KBO에서는 야구 인프라 확장의 일환으로 신규 구단 창단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양 측의 요구가 서로 맞물리면서 창원시는 2만 5천 석의 새 야구장을 2016년까지 짓기로 약속하고 대한민국 9번째 프로 구단을 유치합니다.




당초 시민 구단의 형태도 논의되었으나 비용 면에서 무리라고 판단하고 KBO는 모기업 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 회사로 유명한 엔씨소프트가 KBO 이사회를 거쳐서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이사는 야구단 창단에 나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리니지 하느라 많은 아이들이 방 안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이들을 야구를 통해 바깥으로 불러내고 싶다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의 아홉  번째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2011년 3월 31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는 창원 시장과 구단주가 참석하여 창단 승인식을 가졌습니다. 곧 엔씨는 박차를 가하여 팀 구색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시민 공모를 거쳐 공룡을 모티브로 한 '다이노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명장 김경문 감독이 다이노스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전준호 코치도 고향의 신생 팀에 합류하였습니다.




여름 막바지에 열린 신인 지명회. 드디어 NC의 유니폼을 입은 첫 번째 선수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민호와 노성호, 박민우, 나성범 등은 고/대졸 신인으로 다이노스에 입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단에서 실시한 공개 트라이아웃을 통해  스물두 명의 선수가 합류하였습니다. 방출과 부상으로 야구에서 이미 좌절을 한 번 씩은 겪은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야구란 너무나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들어온 선수로 김진성과 최금강 등이 지금까지 1군 무대에 남아있습니다.




다이노스는 전남 강진에서 생애 첫 훈련 캠프를 차렸습니다. 마산 야구팬들의 눈과 귀는 220km가 떨어진 강진 베이스볼파크로 쏠렸습니다. 강진 훈련장에는 팬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가 현수막으로 제작되어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다이노스는 한 해 동안 퓨처스리그를 치르고 이듬해에 1군 리그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 때문에 2012퓨처스리그가 다이노스의 데뷔 무대였죠. 선수단은 데뷔를 앞두고 각오를 다지고자 눈 내리는 한라산 등반에 나섰습니다. 비록 기상 악화로 백록담은 밟을 수 없었지만 2012퓨처스리그 정상은 밟았습니다. 남부리그 60승35패5무로 승률 0.632 우승. 남북부리그 통합 승률 1위였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봄에는 열망하던 프로 리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3, 거침없이 가자




다이노스의 벅찬 기대와 달리 주변에서는 경험이 전무한 신생 팀의 프로 진입을 두고 우려 섞인 말도 나왔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실력으로 리그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 아니냐는 악담에 가까운 이야기도 들었죠. 하지만 공룡들은 그들의 말이 기우에 불과하였다는 걸 묵묵히 실력으로 보여주었습니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린 날 마산 날씨는 유니폼 홑겹만 입어도 춥지 않았습니다. 오후 5시부터 진행된 경기는 해가 저물고 9회 초 SK의 마지막 공격 차례로 왔습니다. 스코어는 NC가 5대 6으로 앞서고 있으므로 실점하지 않으면 경기는  종료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 점 차라서 SK의 역전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죠.




가슴 졸이는 마지막 이닝에 손민한이 마운드로 올라왔습니다. 첫 번째 타자를 땅볼 아웃으로 막았습니다. 두 번째 타자에게는 2S3B로 볼카운트가 밀린 상황이었으나 역시 1루수 땅볼 아웃으로 침착하게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타자. 초구에 번트가 나왔으나 파울 처리됩니다. 2구에 스트라이크가 선언되자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짝짝짝 짝짝 삼-구 삼진. 허나  3구째에 볼이 들어오자 외마디 탄식이, 아아. 포수 김태군이 마운드로 공을 던졌습니다. 손민한은 모자를 고쳐 쓰고 오른손에 공을 꽈악 쥐었습니다. 마지막 공이 될 수 있을까요. 타석의 김재현이 타격 자세를 준비하고 손민한이 공을 뿌렸습니다. 타자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공을 받아낸 김태군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4구 헛스윙, 경기 종료!




2013 프로리그에서 다이노스는 52승 72패 4무, 승률 4할 이상의 기록으로 9개 팀 중에 7위를 달성하였습니다. 더그아웃에서 나온 선수단은 마운드 주위로 동그랗게 서서 야구장을 가득히 메운 팬들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주장 이호준은 프로 첫 해를 마감하는 소감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내년에는 우리도 가을 잠바를 입을까요? 뜨거운 함성으로 야구장이 불타올랐습니다.








2014, 동반질주




2014년, 다이노스는 열 번째 구단 kt의 창단으로 막내 딱지를 떼어냈습니다. 프로리그 신고식을 치른 만큼 이제는 8개의 형님 구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어야 했습니다. 올해 다이노스의 예상 성적으로 전문가들은 중간 즈음으로 보았습니다. 지난해엔 생각보다 잘 했지만 여전히 프로의 벽은 높다는 것이었죠.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시즌 첫 격전을 벌인 다이노스는 기아를 상대로 위닝을 거두었습니다. 예년과 달리 출발이 순조로웠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다이노스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6월 15일, 한화를 상대로 17안타를 터뜨리며 완벽한 승리를 거둔 그 날은 김경문 감독이 지도자로서 통산 600승을 달성한 경기였습니다. 며칠 뒤 잠실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투수 찰리는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투구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이노스는 시즌 상반기 내내 2위와 3위를 오가며 상위권에서 내려올 줄 몰랐습니다.




인천 아시안게임으로 자리를 비웠던 이재학이 마산으로 돌아왔습니다. 10월 2일, 휴식기 이후 재개된 첫 경기에서 이재학은 SK를 상대로 시즌 10승을 거두었습니다. 신인상 징크스가 따를 것이라는 소문을 잠식시키고 2년 연속 10승 고지에 오른 그의 소식이 참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나 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창단 2년 만에 첫 포스트시즌 진출 확정. 남은 팀 간의 승패 차이로 다이노스의 가을 야구가 결정된 것입니다. 프로 야구 사상 신생 구단의 최단 기간 포스트시즌 진출이었습니다. 다이노스는 승률 0.551로 길었던 페넌트레이스를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질 단기 레이스를 위하여 다시 공룡의 발톱을 가다듬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산 야구장 외벽에는 가을을 맞이하는 초대형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곳곳에서 응원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태어난 그곳 마산 스트리트, 바닷바람 거친 항구의 도시, 특별한 것도 정 갈만한 구석 없어도 난 그곳을 사랑하네♪~




뒹구는 낙엽에도 마산은 외롭지 않습니다. 마산은 이제 변방이 아닌 메인이 되어 가을 야구를 맞이하는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주인공은 다이노스 그리고 마산. 넘실대는 마산 앞바다를 연상시키는 다이노스의 네이비색 응원 깃발이 야구장 여기저기서 펄럭거립니다. 2014년 10월 19일 오후 두 시, 햇살이 따사롭게 마산 야구장을 감싸 안았습니다. 마산 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다이노스의 첫 가을 야구를 축하하였습니다. 1914년 마산 야구가  시작한 지 100주년이 되던 해의  가을날이었습니다.











| 마치며


제가 좋아하는 두 가지 키워드 - 마산과 야구로 글을 준비하였습니다. 글을 마련하는 동안 마산에서는 수 많은 에피소드가 일어났고 많은 분들이 야구를 지속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그저 '마산야구 100년 사' 타이틀로만 쓰기에는 아쉬웠습니다. 2회 분량의 개요만으로 모자란 감이고요. 그래서 100년 시간 속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여섯 개의 힘을 따라서 시대마다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하나씩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짧지만 이 글을 정리하기까지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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