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지켜 온 여섯 개의 힘
마산에서 야구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지방 소도시에서 야구라는 소재 하나로 한 세기 넘게 명맥을 이어왔다는 건 굉장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프로 구단도 없고 메인 무대에서는 소외받았던 작은 도시에서 어떻게 이토록 긴 시간 유지할 수 있던 걸까요.
마산에는 야구를 지키는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섯 개의 힘'이 마산에 호흡을 불어 넣으며 100년 동안 야구의 흐름을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겹겹이 쌓여 20세기에 마산을 야구의 성지(聖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21세기에는 NC다이노스를 마산의 품에 안겨 주었습니다. 마산 야구를 지탱하고있는 여섯 개의 힘을 소개 해 드리고자 합니다.
마산 야구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4년 마산 창신 학교에서는 극일(克日)의 일환으로 야구부와 축구부를 만들었습니다. 책만 읽고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으니 싸워서 이길 건강한 신체를 단련하자는 뜻이었죠.
이후 마산 사람들은 조금씩 기부금을 모아 1921년에 마산구락부 운동장을 짓습니다. 현재 마산 노산동의 육호광장 오거리가 그 자리입니다. 2천700여평 넓이의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야구를 비롯하여 각종 운동 경기와 행사가 열려 당시 마산의 여가/체육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야구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산 사람들이 즐기는 운동이었습니다. 1923년에 열린 '마산 소년 야구대회'에서는 마산의 8개 청소년 팀이 참여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자 야구팀으로 알려진 의신여학교(현 의신여중) 야구 클럽도 이 무렵에 생겼습니다. 선교사에게 받은 글러브와 공으로 여학생들은 주기적으로 캐치볼 연습을 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여자 야구 경기로 기록된 마산 의신여학교와 진주 시원여학교의 경기. 여기서 의신여학교는 48대 40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구성야구단은 마산을 대표하는 성인 야구팀이었습니다. 아홉 명이 모여서 하는 스포츠라 아홉 개의 별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죠. 구성야구단은 1931년 남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전력이 막강한 팀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마산에서는 여러 팀 간의 연습 경기를 가졌다고 합니다. 마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팀과 조선인 팀이 겨루기도 하고, 일본 유학생들이 마산 포구를 통하여 귀국하면 국내 팀과 경기를 치루었다고 하네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는 스포츠로서 일제 시대부터 마산에서는 야구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해방 이후 1946년에는 마산야구협회가 창설됩니다. 이들은 활동 무대를 마산에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 팀을 초청하여 대회를 개최하는 등 야구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마산야구협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가 바로 '4도시 대항 야구선수권대회' 입니다. 마산과 대구, 인천, 서울의 대표 야구팀이 참가하는 이 대회는 마산야구협회의 창설 이듬해인 1947년에 제1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장소는 마산중학야구장으로 현 마산고교 자리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들은 매년 마산에 모여서 전국 최고의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습니다. 마산 팀은 제 2회 대회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마산 야구팀은 전국을 돌며 각 지역 야구 팀과 연습 경기를 펼칩니다. 대전, 전주, 개성 및 서울 지역 대표 팀들을 꺾고 부천에서 미군 팀까지, 전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산 청년의 파워가 한반도를 휩쓸었습니다.
1949년 8월에는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부(府)에서 마산시(市)로 개칭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마산시, 마산 시민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실업 야구 및 고교 야구도 50년대 중반부터 재개됩니다.
실업 야구는 선수들이 직장에 근무하면서 리그에 참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때문에 운영 주체가 기업 또는 수도권의 공공 기관이라 마산에 연고를 두는 곳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산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팀은 있었지요.
바로 한국전력 야구단입니다. 1962년 12월에 창단한 이 팀의 초대 감독은 김계현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마산 출신으로 우리나라 야구사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 야구부 졸업 후 마산 팀 대표 선수로 활약하였습니다. 50년대에는 실업야구계에서 금련야구단(농협) 소속으로 스타플레이어로서 인기를 얻었죠.
은퇴 후 지도자로 전향한 그는 남선전기와 경남고교 감독을 거쳐 실업야구단인 한국전력을 무려 16년간 맡았습니다. 한국전력은 창단 2년 째인 1964년에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는 70년대부터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을 맡아 세계 무대에서 한국 야구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그가 국가대표팀을 맡은 시기에 한국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었습니다.
70년대에 접어들어 전국에 고교 야구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산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트렌드에 예민하지 않습니까. 독립과 전쟁으로 생계가 바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학생 야구 팀이 부활하였습니다. 현재 마산에서는 용마고와 마산고에서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두 학교 모두 야구부 창단 시점을 1936년(용마고)과 1942년(마산고)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동안 용마고의 이름은 많은 변화와 변신을 거듭하였습니다. 일제 치하였던 1921년에 '마산공립상업학교'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얻고 이듬 해 봄에 개교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6년제 '마산상업중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머지않아 51년에 학제 개편이 실시되면서 중등 과정과 고등 과정이 분리되었고, 이 때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2001년에 인문계 고교로 전환하면서 지금의 '용마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습니다.
1963년 1월에는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어 경남에서 분리됩니다. 경남고, 부산고, 부산상고 등 야구부를 운영하던 고교들은 모두 부산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경남에는 고교 야구 팀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63년 6월에 마산상업고등학교(이하 마산상고) 야구부가 재창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산을 넘어 경남을 대표하는 고교 야구 팀이었습니다. 이미 쟁쟁한 고교 야구부들이 활개하는 가운데 마산상고는 생소한 팀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창단 2년 만에 황금사자기 결승에 오르면서 다크호스라는 별명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마산고교 야구부는 1971년에 재창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재정난을 이유로 해체하고 말았죠. 졸업 동문들 사이에서는 모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남는 일이라며 야구부 살리기에 힘썼고, 그 결과 79년에 다시 야구부가 문을 열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79년 마산고교 야구부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마산 창동의 오행당 약방 김회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때에 청강고(마산제일고)에도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청강고 역시 야구 인기에 발맞추어 개교 직후에 교기로 야구부를 창단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운영 미숙과 재정난으로 3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죠. 허나 그 짧은 기간에도 프로로 진출한 선수가 두 명이나 됩니다. 한 분은 지난 번에 글로 소개드린 김상진 SK코치, 또 한 분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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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프로 야구의 출범과 함께 마산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마산은 '제2구장'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메인에서 동떨어져 있었지만 프로 야구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화제의 무대였죠. 글이 길어지는 까닭에 다섯번 째, 여섯번 째 힘은 다음 글에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