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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Sep 23. 2024

떠남에 관하여

약을 끊기로 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길이 한참 동안이나 차트에 머물러 있다.


"약을 끊고 싶다고요?"

"네. 멈췄으면 해요."


비자도 나오지 않은, 아니 어쩌면 끊어놓은 티켓도 없이 이미 나는 오클랜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나를 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단히 무모한 짓인지도 모를 그런 일을 감행하려 드는 것.


"거기서도 처방은 될 텐데요. 방법을 찾으면 될 거예요. 뉴질랜드면 의료도 괜찮을 텐데.."


그는 말을 애써 이으려다 멈칫했다. 차트는 어느덧 맨 앞장을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나의 첫 진료기록 일 것이다. 때는 이천이십일 년. 그리고 봄.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잃어버린 초점.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몸짓. 반쯤 영혼이 나간 듯, 어딘가에 멈춰있던 시선. 그렇게 축 늘어진 몸. 어디서부터 잘못된지도 모를 절망의 정글 속에서  나는 도무지 헤쳐 나올 수 없었다. 그땐 정말이지 나는 그랬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투병 4년 차. 한알로 시작했던 약봉지엔 어느새 다섯 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4년 간 슬픔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웃었고, 때로는 기뻤다. 약 덕분이었을까,  시간이 흐른 덕분이었을까. 오버된 소비습관이라던지 무거워진 몸뚱이를 제외하곤 나쁠 게 없었다. 소홀했던 집안일을 하나씩 되찾았고, 잊고 있던 글쓰기를 그즈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마냥 읽지 못했던 책에 손이 갔던 것이 2년 전쯤이었을까. 없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친 영혼에 누군가 숨을 불어넣은 모양으로 삶의 활력을 조금씩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던 일종의 망상 따위는 그칠 줄 몰랐다. 이전보다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약을 임의로 중단하기를 수어 번. 그때마다 증상은 강화되었고, 다시 약을 먹을 때마다 부작용으로 5킬로씩 무거워졌다.


나를 도와주겠다는 남편과 아주 가끔이었지만 부딪힐 때마다 세상의 절망을 모두 떠안은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때마다 나는 술로써 나를 달랬고, 중독까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에 날 이해해 주는 것은 결국 술 한잔의 시간뿐이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리듬을 유지하는  일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때맞춰 식사를 하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겸하는 등등... 한걸음을 떼는 것조차 주어진 미션처럼 느껴지던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면 요즈음의 나는 꽤나 그 리듬을 찾은 듯했다. 밥상을 차리고, 아이 숙제를 봐주고, 때가 되면 잠을 재우는 것. 일어나는 게 힘들어 화장실조차 몇 시간이고 참아야 했던 날들을 돌이켜 본다면 엄청난 성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요, 약을 줄여줄게요. 일단 기존에 먹던 두 알 중에서 한알의 용량을 줄일 겁니다. 같이 나갔던 주황색 알약은 불안하지 않으면 굳이 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용량을 줄였으니 괜찮은지 지켜봐야 하니 일주일 뒤에 봅시다."


병과 울며 웃으며 동고동락했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나는 약을 자의 반 타의 반 끊기로 했다. 자의라 한다면 나름대로의 리듬을 얼추 되찾어서였고, 타의라 한다면 뉴질랜드로 향하는(나오지도 않은 비자의 희망을 붙잡는) 일정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뉴질랜드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의보단 타의가 더 강했으니까.




요즘 난 시시때때로 뉴질랜드에 가기 싫다는 아이들의 생떼를 들을 때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정확히는 나의 터전 반대편 이방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날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장강명 씨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게 되었다. 마침 영화 예고편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이 둘을 데리고 보러 갈 형편이 안되었던 지라 소설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제법 자극적이고 무거운 제목과는 다르게 내용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떠남의 이유였고, 와신상담해야만 하는 현실이 펼쳐지는 것은 누구든 알만한 자명한 '진실'이었으니까.


책을 덮고는 생각보다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아이들 교육이라는 표면적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혼자라면 역시 나는 떠났을까.


2016년의 샌프란시스코가 문득 스쳐 지나간다. 그때만 해도 투자이민의 문턱이 그리 높지 않던 시절(물론 우리 자산으로는 택도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면 언젠가 미국 저 광활한 땅덩이에 우리 존재를 공고히 할만한 희망 따위는 안을 수 있던 시절 잠시나마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친절한 미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힘들다는 걸 안다면서도 실제로는 1도 몰랐던 시절, 머리대신 가슴으로 이해하려 했던 젊었던 지난날의 철없던 변명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그 새 나와 우리 남편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고, 우울증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생각보다 그 규모는 컸고, 금세 그 심해로 빠져버렸다. 우리에겐 지난 젊은 날의 무모한 희망이라도 필요했다. 나약한 의지로 어딜 갈 것이며 그곳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떠남의 미학을 논하자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떠남은 내가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줄 테니까.  




삶이 참 그렇다.

떠나려니 미련이 남고, 안 떠나자니 못내 아쉽다. 내 의지는 분명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려니 흔들렸다. 내가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약은 억지로 끊기로 했고, 비자는 아직이다. 이민성은 지속적으로 매서류 태클을 걸고 있다. 누군가 이 망설임의 끝을 내어줬으면 속 시원하겠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 그럼 재미가 없으니까.  


우리 정말 가는 걸까.

운명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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