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지옥

by 돌아온 돌보


어릴 때부터 버릇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한번 입은 옷 다시 안 입기.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갈아입었다. 이유는 그저 깨끗한 옷이 좋았을 뿐. 엄마는 매일 툴툴 대셨다. 적당히 좀 하라며. 그래도 난 왠지 한번 입은 옷은 다시 입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갈아입을 때 새 옷에서 나는 포근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좋아했다. 갓 개어 넣어둔 옷에서는 특유의 폭신폭신함이 느껴졌다. 코를 파묻으면 나는 뽀송한 냄새에 기분이 한껏 좋아지곤 했다. 샤워를 하지 않은 날에도 어쩐지 깨끗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주부가 되어, 집안일은 오롯이 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나는 아가씨 때 버릇을 못 버리고 계속해서 나만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하루에 외출을 두세 번 할 때도, 나갈 때마다 갈아입었던 것 같다. 한번 입은 옷에서 딱히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혼자 기분 좋으려고 자꾸만 갈아입었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막상 내가 직접 빨래를 돌리기 시작하니, 이거 참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 내 버릇 그대로 하다가는 매일 하루에 두 번씩 돌려야 될 지경인 것이다. 더구나 내 빨랫감 하나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옷까지 가세하니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데도 세탁기 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아뿔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달라져야 했다.




결혼 전, 엄마는 드럼세탁기가 세탁력이 별로라며 내게 통돌이 세탁기를 강추하였다. 말 잘 듣는 딸인 나는, 엄마 말 곧이곧대로 통돌이 세탁기를 혼수로 마련하였고, 사용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는 빨래할 때마다 후회를 거듭했던 것 같다.


우선, 두 세탁기 종류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확실히 통돌이 세탁기는 세척력이 좋다. 아무래도 물을 많이 써서 그런지 헹굼력도 꽤나 괜찮다. 그 덕에 옷에 김치나 짜장면처럼 잘 안 지워지는 치명적 오염이 아닌 이상, 웬만해선 다 잘 지워졌다. 하지만 통돌이를 쓰다 보니 세탁이 끝난 후 다 된 빨래를 빼내는 데너무나 힘들었다. 옷이 서로 뒤엉켜서는 꺼낼 때마다 열이 받는 것이었다. 성미 급한 사람은 쓰면 안 되는 물건이 분명했다.


드럼 세탁기는 우선 물보단 낙차에 의한 세탁이다 보니 통돌이에 비해서는 세탁력이 약한 것 같다. 하지만, 옷도 덜 구김 가고, 세탁이 종료 된 후 빨래를 꺼내는 일도 꽤나 수월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 집이 생기면 반드시 꼭! 드럼세탁기를 사겠다며.


내가 건조기를 사용하기 시작 한건 첫째를 낳고 나서부터였는데, 어른 빨래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기 빨래는 그야말로 '빨래 지옥'이었다. 하루에 수십 장도 더 나오는 가제수건부터, 애가 게워낼 때마다 갈아입힌 숱한 내복 가짓수까지 더하니 이거 원 빨래 지옥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그런데다 건조대에 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건조대 하나로는 되지도 않아 두 개를 펼쳐 널어야만 했다. 건조대 두 개를 펼쳐놓으면 24평짜리 거실을 금세 꽉 채우곤 했다. 더구나 아기가 점점 커나가면서 장난감이 거실 한켠을 크게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건조대 두 개를 펼쳐 놓으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좁아터진 공간이 되어버린다. 보다 못한 남편이 건조기를 사자고 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의를 했다. 그렇게 나는 이모님 3 대장 중 첫 번째 이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집이 생겼다. 인테리어를 새로하였고, 신혼의 마음으로 가전을 새로이 집어넣었다. 특히 세탁실에 신경을 썼다. 요즘 유행하는 워시 타워랄까, 드럼세탁기 위에 건조기를 올렸다. 그렇게 나만의 세탁실이 탄생하였다. 세탁장을 열어볼 때마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마저 상쾌해진다. 건조까지 마친 빨래의 보들거림이꼭 목욕 후 막 로션을 바른 아기 엉덩이 같기만 하다.깨끗이 고친 집에 깔끔히 마련한 세탁실만 바라보면배고픈 배도 허기가 사라진다. 나는 그 어떤 집안일보다도 빨래에 진심인 것 같다.

이미 예전의 버릇은 버린 지 오래이다. 정말 예전처럼 그렇게 살다가는 내가 빨래 더미에 묻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엄마 말은 잔소리로 들릴 뿐, 내가직접 해봐야 달라지는 것 같다. 한 가지 포기하지 못한 루틴이 있다면, 매일 빨래를 돌리는 일이다. 케케묵은 빨래를 그냥 두지를 못하겠다. 매일 개운하게 세탁을 하고 단정히 개어 차곡차곡 서랍장에 넣어두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그래서인지 힘듦을 자처하는 기분마저 든다.

보기만해도 뿌듯한 세탁실

매일 빨래를,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 어른 빨래와 아기 빨래 각각 돌리다 보면 하루 동안 빨래만 하다 하루가 끝난 기분이 들곤 한다. 더구나 건조기가 있으니 어느 정도 빨래 지옥에서 해방된 줄 알았는데 웬걸, 개는 게 고역으로 다가올 줄이야. 세탁기에 넣을 때만 해도 집안일을 다 끝낸 기분이 들던데, 다 된 빨래를 개려면 한숨부터 새어 나오곤 한다. 이래서 엄마가 내게 옷 좀 그만 갈아입으라 했구나 싶었다.


건조기를 쓰면서 안 좋은 점은 또 하나 있다. 바로 빨래가 몹시도 구겨지는 것. 빨랫감이 적을수록, 빨리 꺼낼수록 구김이 덜 간 다곤 하지만 일정 부분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옷이 금방 상한다. 그래서 비싸거나 약한 질감의 옷은 따로 건조대에 말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역시 100%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없나 보다.

청소기를 돌리고 부엌 정리를 하고 나면 공포의 빨래 개기가 남게 된다. 어른 빨래, 아기 빨래 각각 한판씩 총 두 판을 해치워야 한다. 개면서 매일 생각한다. 아, 빨래 개는 기계는 언제 나오나.

자동차도 자율주행이 가능한 세상에 가전제품 발전 속도는 너무나 느린 것 같다. 식기세척기도 들인 지 얼마 안 되어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마저도 다된 설거지를 찬장에 집어넣는 것도또 다른 '일'이더라. 결국엔 끝이 없는 것 같다. 주부가 된 이상, 내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옷을 아예 한벌도 갈아입지 않는 한,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빨래 더미를 '해치우고' 있다.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빨래를 개면서 마음이 한결 정갈해지는 것이다. 뭔가 수련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한 장씩 곱게 개며 고마운 순간들을 상기시켜본다. 그러면 오늘 하루를 또한 뿌듯하고 쾌적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푸근히 풍겨오는 섬유유연제 냄새 따라 코를 킁킁대는 한편 우리 아이들과 남편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 깨끗한 느낌을 선사할 수 있다 생각하니 한층 행복해진다.


빨래, 지옥이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명상처럼,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수련하는 마음으로 수행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깨끗해지는 느낌. 알고 보면 즐거운 빨래의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