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을 데었다

살림하는 주부 이야기

by 돌아온 돌보


손등을 데었다. 어묵 볶음을 하려고 주물팬을 달궜는데, 포장지를 뜯은 어묵을 한꺼번에 떨어트리던 게 화근이 되었다. 뭐든 급해서는 찬찬히 하는 법이 없다. 살림한지도 벌써 8년, 9년 차인데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살림하는 데 있어 여유를 부리는 법이 없다. 늘 빨리빨리를 외치며, 하나라도 더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서는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다.




주부는 할 일이 많다.

노상 하는 일인데 뭐가 많으냐 하겠지만 청소기 돌려야지, 주방 정리해야 하지, 2주에 한번 침대 시트 갈아야지, 매일 산처럼 쌓이는 어른 빨래 아이 빨래 두 판씩 돌려야 하지, 다 된 빨래 개야지 거기다가 우리 집 파괴자들 1호 2호가 너저분하게 벌려놓은 장난감 잔치라도 치울라치면 하루도 부족하다. 그 새 중간에 아이들의 등 하원도 책임져야 한다. 육아하려고 휴직한 건 사실이지만, 어째 억울하다. 나도 내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커피 한잔 마시며 글 한편 쓰기에도 버거운 실정이다.


더구나, 장 봐 놓은 것들을 제때 처리해놓지 않으면 모두 음식물쓰레기 행이다. 이번엔 한 박스나 선물 들어온 어묵을 정리하느라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나 많은 어묵을 정리하는데 제격은 역시 어묵볶음과 어묵탕이다. 평소에 즐겨먹는 메뉴는 아니지만, 이런 때에 한번 먹어보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다친 그날도 그랬다. 반찬 한 가지만 해도 힘든데, 멸치볶음에 메추리알 조림까지 마치고는 남편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반찬 초치기에 들어갔다가 일이 난 것이었다. 포장지를 뜯고는 조심히 팬에 내려놨어야 하는데, 포장지 째 그냥 던져넣다 공중으로 흩뿌려진 기름방울에 손등을 내줘버린 것이다.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다. 다음날 세 개의 물집이 잡혔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터트리고 말았다. 피부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따끔거리긴 했어도 물질을 안 할 수 없었다. 나는 살림하는 주부였으니까. 아이를 씻기고,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다 보면 물이 안 닿으려야 안 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다 덧이 났다. 덧이 난 화상 자국은 생각보다 안 좋아져만 갔다.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그때가 다친 지 일주일이 되던 때였다. 집 근처에서 유명한 화상외과를 찾았다. 너무 늦게 왔다 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치료해보자 하셨다. 그렇게 매일같이 병원에 출근 중이다.


다친 부위는 물이 닿으면 낫질 않는다 했다. 첫날엔 반쯤 듣고 반쯤 흘려듣느라 물을 좀 사용했던 것 같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는 퉁퉁 불은 메디폼을 보시더니 이럼 낫질 않는다 혼쭐이 났다. 그로부터 지금껏 살림을 잠시 멈춤 중이다.


살림을 잠시 멈췄더니, 한결 여유로워졌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어서 그런가 왠지 더 좋았다. 집은 지저분해서 엉망인 상태이지만, 마음은 어쩐지 모르게 해방감으로 자유롭다. 정신없는 거실 바닥 한 구석에 앉아 기분이 한껏 좋아지는 노라 존스의 음악에 커피 한잔을 곁들이니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싶을 정도이다. 평소엔 바빠서 보이지 않던 계절의 변화가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이렇게 높고 새파란 하늘이 이 땅을 점령했는가 새삼스럽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삶. 요즘 날의 일상이다.

여유가 한아름 생기니, 마음이 바쁠 틈이 없다. 느림의 미학을 온몸으로 체감 중이다. 온 행동에 여유가 잔뜩 묻어져 나온다. 엎어진 김에 쉬어진다는 말이 마음 깊이 와닿는 하루. 다친 손을 물에 닿지 않기 위해 애써 노력하느라, 오른손 하나로만 지내려 하니 힘든 점도 없잖아 있다. 한 손으로만 살아가려니 새삼 양손의 자유로움이 그립기도 하고 가진 것에 대한 깊은 감사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핑계 김에 게으름을 피워보니 좋은 점도 많다. 남편이 매일 머리를 감겨주는 특혜도 누려보고, 우선 삶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기분이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다가 속도제한에 걸려 60으로 천천히 달리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기분이랄까.


그러다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바삐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휴식도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을 듯 싶다. 데인 상처는 흉터로 남겠지만, 이 역시 그저 앞만 보고 질주하다 생긴 사고가 아닐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빨리 달리기만 했다. 주변을 살필 기력조차 남아나질 않아, 시야가 오로지 앞에만 국한되어 애먼 세월만 빠르게 흐르는 것이었다.


잠시 멈추자.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 겪어보니 정말로 괜찮다. 먹고사는 일상만 아니라면, 작은 의무 하나쯤은 멈춰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 아니어도 되는 일은 잠깐 접어두기로 했다. 빠르게 달리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해보기로 한다.


반찬 세 개 동시에 만들기 금지. 매일 빨래 돌리기 금지. 바빠도 아침은 꼬박 챙겨 먹기.


그리고 하루에 한 번 고개를 높이 들고 하늘 바라보기.

잠시 예쁜 노을 정도는 봐주는 여유를 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