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축제

남대문 수입 주류상가를 다녀와서

by 돌아온 돌보


아이들이 잠에 들고 난 뒤 자욱이 깔린 어두운 밤의 한 자락에 곁을 내어줄 때, 우리의 축제는 비로소 시작된다. 찬장 속에 가지런히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셰이커를 꺼내더니 갖은 리큐르를 기호껏 넣고 주조에 들어간다. 차디찬 얼음으로 잔을 칠링 해놓고, 그동안 오늘의 칵테일을 만들어 본다. 화려한 색으로 치장을 마친 칵테일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한 모금 목을 잠시 축인 뒤, 이내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기 위해 분주해진다. 오늘은 머릿속으로 그려본 새로운 맛을 재현해보기로 했다.




안주 중에서 제일 만만한 것이 카나페이다. 토핑을 달리하면 그 가짓수와 맛이 매우 다양해지는 안주이다. 만들기도 쉽고, 만들고 나면 그런대로 비주얼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인지 술안주로 제법 자주 만드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참치 카나페는 맛의 궁합이 좋다. 칵테일과도 잘 어울리고 위스키에도 제격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급하게 만들려고 보니 가장 핵심 재료인 참치가 없었다. 깊은 밤 참치를 사 오기도 어려운 시간. 마침, 고추참치가 눈에 띄었다. 한번 만들어보기로 해본다. 맛없어도 그런대로 먹어보자 싶어 만들어 본 고추참치 카나페. 맛은 우리가 아는 그 맛이다. 고추참치에 마요네즈를 잔뜩 두른 그 맛. 매콤한 참치가 고소한 마요네즈와 제법 잘 어울린다. 안주로 딱이다. 있는 재료로 만들어 본 새로운 안주, 맛이 제법이었다. 앞으로 자주 해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신혼 때부터 우리는 남대문 수입 주류 상가를 꾸준히 다녔다. 요즘에야 홈텐딩이 한참 유행 한다 치지만, 9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주량이 약했던 날 위해 남편은 마트에서 산 '말리부' 리큐르를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말아주었다. 그로부터 보드카를 사더니 스크루 드라이버를 만들어 마셨고, 수입 주류로 유명하다던 남대문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초보 홈바텐더인 우리는 그곳에서 지거와 셰이커를 구입하였고, 리큐르를 하나씩 마련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만들었던 칵테일 중 나의 최애는 바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보드카를 베이스로 쿠엥트로, 라임 주스에 크랜베리 주스를 섞고 쉐이킷 한다. 완성된 칵테일은 마티니 잔에 내어 서빙한다. 미국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좋아하는 칵테일로 유명세를 탄 녀석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칵테일이 하나씩 수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갖가지 색깔의 다양한 칵테일을 위해 필요한 리큐르는 점차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만들 수 있는 칵테일의 가짓수가 20여 개에 이르렀다. 블루 사파이어, 블루 하와이안과 같이 푸른빛이 아름답게 발하는 칵테일부터, 크랜베리 주스나 그레나딘 시럽의 붉은빛으로 장식한 섹스 온 더 비치 라든지, 코스모폴리탄까지 보기만 해도 예쁜 형형색색의 칵테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결국엔 칵테일 책까지 마련하여, 메뉴판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어김없이 우리에게 짙은 어둠이 찾아오거든 그제야 밤의 축제가 비로소 시작된다. 그 어둠의 축연 속에서, 우리만의 바를 만들고 그 아름다운 칵테일의 세계 속에 그만 흠뻑 취해버린다. 그러면 그간 쌓인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홈텐딩 취미를 위해서 남대문수입상가는 최고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주말이면 사이좋게 손을 잡고선 주류 상가에서 새로운 칵테일을 위한 재료를 구입해본다. 다 떨어진 리큐르도 다시금 채워 넣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새롭게 접한 리큐르는 또 다른 칵테일을 만들어냈고 더불어 나는 그것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어내기에 바빴다. 매일이면 우리 바는 개장을 하였다. 단골은 역시 우리 부부. 이 세상 최고의 바였다.


그러다 아이들이 생기고 칵테일이 다 뭔가,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려워졌다. 육아로 지쳐 피로해진 몸은 큰 바위에 짓눌린 것 마냥 천근만근이었다. 평일엔 그렇다 치지만, 주말까지 우리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억울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도, 날 위한 단 한 시간조차 허락지 않다니. 그래서 주말만큼은 사수하기로 해봤다. 하루 종일 커피로 카페인 충전을 해놓는다. 못해도 영화 한 편에 술 한잔은 꼭 즐기기로 해본다.




오랜만에 남대문을 들렀다.

아이들 내복도 사보고, 드디어 주류상가도 방문해 본다. 신혼 시절 즐겨 찾던 '석진 상회'엔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요즘 정말 홈텐딩이 유행이긴 한가보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서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리큐르를 구매하기 바쁘다. 멀찌감치 뒤에 서서 아기띠에 매달린 둘째를 달래 가며 필요한 리큐르를 고민해본다. 마침 미도리 사워가 당겼다. 그간 마트를 다 뒤져 미도리를 찾아 헤맸지만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없었기에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멜론 리큐르 미도리가 눈에 띄었다. 드디어 데려올 수 있었다.


하루 동안 충전한 카페인은 우리를 밤의 축제로 소환하였다. 미도리로 만들 수 있는 칵테일 레시피를 바삐 찾아본다. 재페니즈 슬리퍼, 미도리 사워, 준벅, 멜론 볼, 만들 수 있는 칵테일도 참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새콤한 맛이 두드러지는 제페니즈 슬리퍼는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쿠엥트로 리큐르에 미도리와 레몬즙을 넣고 섞는다. 멜론 리큐르로 만들어보는 마가리타 맛이라고 해야 하나, 새초롬한 맛에 혀 전체가 쫀쫀해지면서 급히 안주가 당긴다. 이때 오늘 새로이 만들어 본 고추참치 카나페를 곁들여본다. 행복이 어디 멀리 있나 싶었다. 바로 이곳, 지금 이 순간의 우리와 함께할 뿐이었다.


제페니즈 슬리퍼와 고추참치 카나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