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독후감 - 굿나잇책방의 겨울
아주 어렸을 때 생일파티를 연 희미한 기억이 있다. 같은 반 유치원 친구들을 모아두고 엄마 아빠가 준비해 둔 과자와 떡볶이를 먹었었다. 그 해가 지나고 대부분의 학창 시절 생일은 가족과 함께였다. '생일'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다. 미국에 가고 나선 내 생일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부러 숨겼는지, 아니면 아무도 묻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다시 9월 26일이 특별한 날임을 알게 된 건 2022년, 고등학교 마지막 해의 초입이었다.
한국에서의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직 후덥지근한 열기가 남아있던 뉴저지의 캠퍼스로 돌아왔다. 당시 나는 이성 교제에 대한 열망이 뚜렷했다. 이대로 가다간 10대 때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어른이 돼버릴 것이라는 그런 걱정. 남녀 비율이 공대 뺨치는 과학고의 특성상 그리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진 않았다.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여학생들이 수두룩했고, 내가 좋아하는 외모상은 더더욱이 적었다.
V는 그 타이밍에 내 눈에 든 유일한 여자였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작년에 잇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진 뒤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겼고, 다가가는 방법도 서툴렀다.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 '못 먹는 음식이 있냐', '미국엔 언제 왔냐' 등 그녀와의 대화는 인터뷰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어색한 시간들을 넘기고,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주말엔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같이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시내에서 작은 여우 키링을 사서 선물해주기도 했다. 소파에 둘이 딱 붙어 앉아 영화를 보고, 둘이 독서실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녘까지 떠들곤 했다.
9월 26일, 서로를 알아간 지 한 달 남짓이 되던 날, 첫 생일선물을 받았다. 수제 초콜릿 세트였는데, 선물 자체를 받은 게 처음이라 로봇처럼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했었다. 아껴먹던 그 초콜릿 세트는 기숙사 침대 아래 한 구석에 아주 오랫동안 자리했다. 다 먹어버렸다고 한들, 그 세트 케이스만 바라봐도 그녀와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되게 해원과 은섭 같은 연애였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기숙사 지붕 아래, 몇 방 건너서 살고, 둘이 붙어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겨울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내 고등학교 졸업까지 만이라는 끝이 있었으니까.
『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은섭과 해원, 두 고등학교 동창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따뜻한 로맨스를 그린 소설이다. 어느 겨울의 초입, 해원은 서울에서의 미술 강사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혜천시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의 이모가 운영하고 있는 펜션 '호두하우스' 표지판을 따라 캐리어를 끌던 중, 은섭이 운영하는 '굿나잇책방'을 보게 된다. 호두하우스 바로 옆 집에 살던, 그리 잘 알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창 은섭. 굿나잇책방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해원과 은섭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골의 작은 책방에 전등을 팔러 오시는 근상 아저씨, 긴 머리에 파마를 한 친숙한 모습의 수정 이모, 동네 약국 막내딸 현지, 독서 모임 날이 되면 항상 과일을 프라이팬에 자글자글 구워주시는 리어카 할아버지까지. 이 책은 그들의 소소하고 따뜻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내가 로맨스 소설을 자주 읽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전공도 컴퓨터과학과에, 성격조차 MBTI로 치면 매우 T였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에겐 너무 차갑고, 냉소적이고, 남에게 무관심하며, 너무나 계산적인 사람으로 비춰지는게 싫다. 그런 성격을 보완하고 머리는 차갑되 심장만큼은 좀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다.
하지만 로맨스를 주로 읽게 된 건 무엇보다도 V 때문이다.
보영은 해원의 둘도 없는 고등학교 단짝이었다. 해원의 엄마가 아빠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한다는 비밀을, 오직 보영에게만 말했던 비밀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둘의 사이는 갈라졌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해원이 다시 혜천시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동창회에서 재회했다. 동창 장우의 오지랖으로 받은 해원의 번호로 보영은 용기 내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누적되는 것들은 의외로 힘이 세고, 이제 와서 한꺼번에 걷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해원은 '날씨가 좋아지면 그때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V와 헤어지게 된 건 온전히 나의 결정이었다. 벚꽃이 지고, 다시 여름의 열기가 드리운 7월의 어느 날, 그녀에게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성격차이가 있었다. 한 번은 둘이서 배드민턴을 치던 중 여자 배구부가 내 시야에 스치는 걸 본 뒤 잠시 눈을 돌렸다가 뗐을 때, V는 배드민턴 채를 툭 내려놓으며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울상을 한 채 눈물을 보였고, 저녁이 지나고 나서야 내게 이유를 설명했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당시 난 V를 제외한 이성과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그녀와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V는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에도 그대로 믿지 못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내 말의 의미를 파헤치려는 것 같았다. 아무 의도 없는 순수한 말이었는데도.
해원은 명여 이모의 '그냥 만나기 싫다고 솔직히 말하렴.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날씨 좋을 때 보자... 난 그런 빈말 싫더라.'라는 말에 못 이겨 보영을 만났다. 시켜놓은 브런치 런치 세트엔 서로 손도 대지 않은 채 보영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벌을 너무 오래 받는 기분이었어." 해원은 그녀가 보내온 편들을 읽어보지 않았고, 사과를 하고 싶었던, 설명을 하고 싶었던 보영을 완전히 차단했다. 보영과의 소중한 추억이 금이 간 채 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벌을 너무 오래 받은 나머지 오히려 벌을 준 사람의 잘못이 더 커지게 된다니. 이 책을 읽기 전까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다.
V와 연애를 하던 당시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시오패스에 가까웠다. 남에 대해 굉장히 무관심했고, V가 뾰로통해지거나 눈물을 보일 때면 공감해 주고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 것인지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눈치 없이 제시하려 했다. 한 번은 V가 감기에 걸린 적이 있는데, 통화로 약을 잘 사 먹고 챙겨 먹으라는 말만 남겼었다. 하다못해 당장 약국에 달려가 약을 지어왔어야 했는데. 입만 산 놈이었다. 이젠 V의 입장에선 내가 자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불안했다는 것을 안다.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고, 애정 표현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보영과 해원의 화해나 다툼도 아닌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며칠 뒤 굿나잇책방을 지키고 있던 해원의 앞에 보영이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씨앗을 심은 화분을 건넨 뒤 보영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널 생각하면서 심었어. 곧 싹이 날 거고 꽃도 피겠지만, 싫으면 물 안 줘도 돼. 봄이 오기 전에 말라죽는다면 넌 내가 뭘 심었는지 영영 모르겠지. 복수가 아니라 사과하는 거야." 시간이 흘러, 해원이 그 싹을 틔웠을 땐 초록 빛깔의 향긋한 향이 나는 레몬밤이 머리를 내밀었다. '애정과 위로', 그게 레몬밤의 꽃말이다.
이 책은 단순한 해원과 은섭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남는 건 결국 사랑이니까, 우리 서로 용서하자.'
보영과 해원은 서로를 용서했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해원의 엄마는 이모 명여와 연년생 차이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해원의 아빠를 차로 쳐서 살해했다고 믿었던 엄마. 20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명여 이모가 고백을 했다. 그 자리에 명여가 있었고, 차를 타고 도망치려던 엄마를 막아 세우던 아빠. 그리고 그 차를 몰고 친 장본인은 명여라는걸. 이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숨겨왔던 걸 해원은 처음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명여의 마음, 그리고 해원을 사랑하는 감정은 거짓이 아니기에 용서를 하고 만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들뜬 마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너의 호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난,
너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줬어.
너를 통해 따스함을 배웠고, 배려를 배웠고, 사랑을 배웠어.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날씨가 좋아지면, 내 날씨도, 너의 날씨도 좋아지면,
그때가 되면. 그날이 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