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지니어스 시리즈를 좋아한다. (더지니어스 : 매 회마다 게임을 진행하며 최후의 1인을 뽑는 리얼리티 쇼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tvn에서 방영됨) 7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보고 있다. 물론 전설의 이두희 신분증 사태 이후 손절한 시즌2는 다시 보지 않는다.
더지니어스를 참 여러 번 봤는데, 시즌4의 10화가 최근 유독 울림을 줬다. 내가 아끼고 응원하던 홍진호가 떨어진 회차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그러다 보면 또 많은게 바뀌잖아요. 저 역시 예전에 초대 우승자로서 언제까지 제가 우승자, 왕 대접을 받겠어요. 지금은 저보다 더 뛰어난 친구들, 더 잘하는 친구들, 그리고 지금 숨어있는 친구들, 굉장히 많을거라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나서야 할 타이밍인 것 같고.
시즌1 우승자였던 홍진호는 시즌4 10화에서 떨어지며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배경 음악으로는 Radiohead의 No surprises라는 곡이 흘러 나왔다. 배경 음악과 홍진호의 멘트가 잘 어울렸고, 이걸 본 시각은 자정 즈음이었고, 그래서 나는 더 생각이 깊어졌다. 더지니어스 시즌4가 방영된 2015년엔 아무 감흥 없었던 이 장면이 2020년의 나에겐 크게 다가왔다.
결과에 승복하고 쿨하게 떠나는 홍진호가 멋있으면서도, 시즌1에서 영웅이었던 그가 더 뛰어난 다음 사람을 위해 물러선다는 말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나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어서일까. 저 짧은 멘트를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모른다.
최근 홍보 주니어를 뽑는 인터뷰에서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열정 가득하고 생각 깊은 후배들을 봤다. 그들은 더지니어스 시즌1에서 남다른 천재성을 보여주며 모든 출연진과 시청자를 놀라게 만들었던 홍진호 같았다. 문득 시대가 바뀌었음을 느꼈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이 친구들이 나서야 할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런 걸 느낄 연차는 아닌데 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의든 타의든 업을 떠나는 사람을 꽤 많이 봤다. 예전엔 그게 나의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떠나는 사람을 보면 나의 미래가 오버랩 되곤 한다.
탈락해서 가는 것 보다 살아오는 과정상 살고 보자는 마인드가 컸던 것 같아서 기대했던 분들에게 죄송했어요. 보여주고 갔어야 했는데 그게 가장 아쉬워요. 저도 이제는 도전자의 입장에서 다시 시작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홍진호는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아쉬움을 솔직하게 전했다. 시즌1에서 보여준 발상을 뒤엎는 천재적인 플레이를 시즌4에서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올해로 커리어 만 10년을 맞이한 나는 지금 시즌1의 홍진호일까, 아니면 시즌4의 홍진호일까. 그 동안 차근차근 갈고 닦은 경험과 노하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시기가 이제 막 시작됐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현실의 나는 그저 살고 보자는 마인드로 시즌4의 홍진호처럼 하루하루 회사를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커리어에서 리즈시절은 언제일까.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할 땐 인하우스 이직을 꿈꿨다. 그리고 어느샌가 난 꿈꾸던 모습이 되었는데 그럼 지금이 리즈시절인가. 아니면 치열하게 일했던 대행사 시절이 리즈였다고 해야할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늘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 '그 때 참 열심히 했지' 라고 말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없다. 시즌4의 홍진호가 아무것도 못 보여주고 떠나게 된 점이 아쉽다고 했는데, 나도 지금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탈락자 홍진호가 더지니어스 스튜디오의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마지막으로 성우의 내레이션이 흘러 나왔다.
더지니어스의 아이콘이자 상징이었던 홍진호씨, 더지니어스의 창세기를 열었던 그는 다시 도전자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나에게 홍진호는 최고였다. 그가 시즌2와 시즌4에서 몸을 사렸을지언정, 시즌1에서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정말 더지니어스의 창세기를 열었으니까. 나에겐 시즌1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내가 시즌1의 홍진호만 기억하는 것처럼 나의 여러 시절을 봐온(10년 전 함께 근무했던 분들도,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분들도) 동료들이 나와 함게 일했던 그 순간을 내 커리어의 정점, 리즈시절로 기억해 줬으면. 그렇게 기억에 남기 위해선 바뀐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며 늘 도전자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진호의 탈락은 일을 떠나 보내는 방법에 대한 힌트가 되기도 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나의 일을 떠나 보내야 한다. 내가 떠나 보내든,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떠나 보내지든. 언제 어느 위치에서 이 애증의 업을 떠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엔 꼭 홍진호처럼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시즌1의 기억을 남기며 쿨하게 떠나고(쿨하기 위해선 후회와 미련 없이 일해야 될거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 응원해 주고. 그리고 나는 다시 어느 분야의 도전자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그나저나 더지니어스 보고 이렇게 진지한 생각 할 정도로 더지니어스 팬인데 시즌5좀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