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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미 Feb 25. 2021

회사에서 삽질을 했다

웹드라마가 어느 집 개 이름인교?

우리 웹드라마 제작합시다


팀의 막내 직원이 툭 던진 말이 아니다. 매일 종이신문을 읽는 본부장님이 진지하게 꺼낸 얘기다.


새해를 맞아 커뮤니케이션 플랜을 보고했는데 뉴미디어 내용을 보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60년대생 부대표님은 요즘 누가 신문 보냐며 유튜브, SNS에 집중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부대표의 지시에 따라 본부장이 생각한 대책이 바로 웹드라마다.


갑자기 웹드라마를 왜 만들어요?


나는 반문했다. 어째서 결론이 웹드라마인지 궁금했다. 흔히 생각하는 제작 스튜디오나 대행사와 함께 하는 작업 일리 없다. 예산은 없었고, 대표든 부대표든 웹드라마를 만들라 지시한 적 없으니 새로운 예산이 떨어질 가능성도 전무하다. 부서 내 20대 직원 1명과 나 포함 30대 직원 2명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왜'가 중요했다. 동기부여가 돼야 일을 하지 않나. 언론 PR을 중점적으로 해온 커뮤니케이션 본부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웹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게 PR 효과가 있을지.


이 기사 좀 봐. 요즘 애들은 웹드라마를 많이 본대. 기업도 만들어서 홍보 효과가 좋았고 어쨌고 저쨌고


통신사가 만든 웹드라마 내용을 취합한 기사였다. 맞는 말이다. 백날 기사 내는 것보다 잘 만든 웹드 하나가 엄청난 바이럴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다.


20년 PR 경력을 지닌 본부장님은 스토리텔링과 메시지 전략에 강한 분이셨다. 커뮤니케이션 본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큰 줄기로서 회사를 내려 봐야 하고 그 속에서 키 메시지와 스토리를 뽑아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같은 업에 종사하는 후배로서 매우 리스펙 하는 점이었다.


그의 강점이 독으로 작용할 줄이야. 아마추어적 결과물이 나올 게 뻔하다는 나의 말에 본부장님은 "스토리만 탄탄하면 된다"라고 답변하셨다. "유튜브 인기 영상들을 봐라, 여기에 엄청난 편집 기술이 들어갔나? 아니잖아. XX님도 이 정도는 편집할 수 있잖아?"라며 영상을 고퀄리티로 만들 필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들인데 못할 게 뭐가 있", "왜 안 된다고만 생각하냐", "XX님은 안 된다는 전제를 아예 깔고 말하는 것 같아". 내 양쪽 귀는 스토리 만능주의자에게 폭격당했다.


직감했다. 웹드라마는 필연임을. 반대해봤자 시간만 흐를 뿐. 그래, 하자.


반갑다, 웹드라마야.


알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열심히, 심지어 열정을 불태우며 그 속에서 재까지 찾을 나 자신을. 침 튀겨가며 반대했지만 또 어떻게든 해볼 변태 같은 나를. 안다.


업무 분담이 속전속결 이뤄졌다. 스토리를 짰다. 제목은 <그 남자의 여자>. 여직원이 남직원을 짝사랑하는데 남직원은 이미 여자가 있다. 알고 보니 남직원의 여자로봇(회사의 인공지능 서비스)이었다는 매우 진부한 스토리. 스토리 안에 기업문화를 자연스럽게 넣으란다. 복지제도도 넣고요, 혁신 인공지능 서비스의 장점도 소개하고 로맨스에 유머까지 추가하란다. 좋다는 건 다 넣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했다.


이제 연기자를 섭외해야 한다. 자급자족. 회사 직원이 연기자가 된다. 여기서 또 본부장님 의견이 충돌했다.


누가 연기를 하느냐, 발연기는 차은우만 용서된다, 직원 섭외가 힘드니 물질적 보상이라도 충분히 줘야 한다

vs 이건 보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말 회사를 사랑하면서 끼 있는 신입 직원 많다, 그들을 섭외하면 된다


의외로 섭외는 순탄하게 진행됐다. 본부장님 의견대로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애사심 넘치고 적극적이면서도 어려서 거절에 익숙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이게 바로 20년 회사생활 짬바인가. 본부장님 예상대로 신입 직원은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타 부서 본부장이 따로 불러다 부탁하는데 제 아무리 90년대생이라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녀 주인공 섭외를 완료했다. 대본도 완성했다.



컴 본부는 서비스 론칭 플랜을 짜야합니다


막 촬영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갑자기 새로운 오더가 떨어졌다.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비스 론칭일이 정해져 론칭 프로젝트 TF에 우리 부서 전원이 들어가게 됐다는 내용. 당분간 외부 커뮤니케이션도 하지 말고 론칭 프로젝트에만 집중해야 하는 전시 상황이 시작됐다.


웹드라마 프로젝트는 비눗방울처럼 사라졌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우리가 한 건 삽질이로다.


삽질을 함께한 팀원들은 지금 다른 회사로 각기 흩어졌지만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웹드라마 제작할 뻔한 이야기를 하며 폭소한다.

아직도 누군가의 하드에 저장돼 있을 대본만 생각하면 노트북째 통으로 불태우고 싶다.

다행인 건가. 웹드라마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면 그거야말로  흑역사였을텐데.


어쨌든 우리는 회사에서 기똥차게 삽질을 했다.


그땐 몰랐다. 웹드라마는 삽질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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