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하고 싶은 회사, 퇴사하고 싶은 회사
입사와 퇴사에 대한 이야기
세 차례의 이직을 거쳐 네 번째 회사에 와 있다. 첫 회사 4년 9개월, 두 번째 회사 1년 1개월, 세 번째 회사 2년 9개월. 네 번째 회사는 1년 2개월 째 현재 재직 중.
모든 회사는 한 때 입사하고 싶던 곳이던 동시에 퇴사하고 싶던 회사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첫 번째 회사는 압구정에 있었다. 대로변과는 조금 떨어진 골목에 위치한 5~6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다. 건물 1층은 상가가 아니었다(인턴으로 다녔던 회사 1층에 샤브샤브 간판이 붙어 있는게 싫었다) 사무실도 깔끔하고 뭔가 포근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후 3개월 인턴 경력이 전부인 쌩신입이었지만 1차 면접에서 뭔가 이 회사 전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소액이었지만 면접비를 주는 모습에서 회사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일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들어간 첫 회사. 아무리 힘들어도 퇴사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3~4년차 쯤 이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몇 번 면접을 보러 다니긴 했지만 좀 더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었다. 그렇게 4년 9개월이 되었던 어느 시점. 일이 나를 갉아 먹고 있음을 느낀 순간 퇴사를 결심했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강남 포스코사거리에 위치한 두 번째 회사는 이름 들으면 알 만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홍보대행사 다니면서 그토록 원했던 인하우스다. 내가 이용하던 서비스였기 때문에 헤드헌터의 JD를 받자마자 회신했다. 건물이 세련됐고 1차 면접에서 느꼈던 회사의 분위기도 좋았다. 카페테리아가 정말 넓었다. 그 서비스처럼 아기자기했다. 1인 홍보담당자라는 게 두려웠지만 그래도 입사하고 싶었다. 당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사내에 홍보 전문가는 없었기에 내가 열심히 하면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코스닥 상장사라 어느 정도의 안정성도 고려했다.
1년 만에 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사라는 게 일이나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안정성과 소속감을 줘야 하지 않나. 그 부분에서 최악이었다. 회사가 매각됐고 CEO가 두 번 바뀌었다. 내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고용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모든 게 불안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회사는 불안과 공포를 주는 회사가 되어버렸다.
가장 간절하게 입사하고 싶었던 곳은 세 번째 회사다. 일단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회사 중 규모 면에서 가장 컸다. 건물이 으리으리했고, 젊고 자유롭고 활기찼다. 실리콘밸리가 이런 느낌일까. 1차 면접을 본 나는 친구들과의 단톡 방에 외쳤다. "나 이 회사 너무 들어가고 싶어". 당시 나의 경력 정확히 5년 9개월. 혼자서 업무를 하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들던 시기에 20년 이상 PR을 해왔다는 상사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팀원도 나까지 다섯명이랜다. 2차 면접을 정말 열심히 준비한 후 대표를 만났다. 치열함을 강조하는 분이었다.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지난 커리어를 인정해 주는 분이라서 이런 분과 함께라면 더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이곳에서 일을 기깔나게 잘 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그렇게 좋아했던 건 내 인생 통틀어 처음이다.
좋은 회사였다. 수평적이었고,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커리어에도 좋았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나. 회사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음을 나 또한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과거의 성공방식에 갇혀버린 사람들, 장황한 비전(진리는 단순하고 개소리일수록 장황하다지?). 엉뚱한 지시가 내려오고, 그걸 해야하고, 그 일이 엎어져서 원점이 되고, 또 다시 엉뚱한 지시를 이행하고 무한 반복. 이대로 있다가는 커리어가 다 꼬여버릴 것 같았다.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런 와중에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고 워라밸이 좋았고 안정적이었고 사람들이 좋았다. 하지만 성취를 찾을 수 없는 회사를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네 번째(현) 회사는 언젠가 홍보 포지션이 열리면 꼭 한 번 이력서를 내보고 싶던 곳이었다. 여러 분야의 홍보 일을 해봤지만 그 중 내가 제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분야라는 걸 스스로 알았다. 막상 채용 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나니 여러 불안감이 생겼다. 홍보팀 구성이나 회사의 규모 등 여러 측면에서 다니고 있던 회사보다 작은 편이었다. 건물도 이전 회사보다 안 좋았다(아니 왜 이렇게 건물에 집착?ㅋㅋ) 하지만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중요한 건 회사의 규모, 홍보팀에 몇 명이 있고 예산이 얼마가 있느냐가 아니라 회사의 성장 가능성과 그 속에서 내가 기여할 부분이 있느냐니까. 회사의 성장을 믿었고, 그 성장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의 지난 커리어들이 모두 이 회사 입사를 위함인 것처럼 모든 게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조건이 좋았다. 최종 오퍼 메일을 받자마자 입사를 결심했다.
네 번째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1년 2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지금의 회사가 좋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회사가 커도 문제, 작아도 문제, 일이 많아도 문제, 적어도 문제. 앞으로 또 어떤 포인트에서 입사하고 싶던 회사가 퇴사하고 싶은 회사로 바뀌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