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01. 장마의 시작
아침부터 하늘이 뚫렸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는 사방팔방 땅으로 향한다. 우산이 있어도 피할 수 없었다. 양말은 이미 젖었고, 바지는 허벅지까지 축축해졌다. 회사를 관두겠다고 말한 뒤 바로 시작된 장마, 마음은 가벼워졌는데 몸은 곱절로 무겁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에도 야근은 계속되었다. 조금만 일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 회사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끊을 수 없는 장시간 노동의 압박 속에 출근만 하면 눈이 잘 떠지지 않는 병에 걸렸다. 산뜻한 아침, 기대되는 하루, 새로움을 느끼며 맞이할 내일을 꿈꿀 수 없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곳을 경험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서 일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지, 나아가 사람의 소중함과 조직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머물던 곳을 떠날 땐 좋은 것만 기억하고, 모든 순간이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팀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간 목표달성 및 주요 현안을 설명하는 자리인 간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02. 섬뜩한 간담회
간담회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이사의 메시지가 청중을 향해 울려퍼진다. 복잡하고 다양한 시장 상황, 우리 업권을 위협하는 요소와 그 속에서 발굴하고 성공시켜야 하는 것들, 우리가 넘어야 할 과제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팀장급 직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다.
대표이사의 말처럼 이 조직을 둘러싼 업권은 변동성이 강하다. 그래서 앞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그때마다 닥친 이슈를 대응하는 것에 집중한다. 장기적인 전략보다 단기적인 이득과 실리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Market Share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이다. 업권 내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기존 시장에서 고객군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서비스 및 마케팅 전략을 다각화하는 방식보다 무조건 경쟁사의 고객을 뺏어오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믿는다. 경영진부터 고위 직책자들은 우리가 놓여진 시장은 Zero-Sum Game이기 때문에 경쟁사를 밟고 올라서야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바꿔 말하면 경쟁사만 바라보고 쫓아가는 방식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경쟁사만 이길 수 있다면, 그들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면 불법이든 부당이든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 그런 광기가 이 조직을 성장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쉽게 희생되고 버려지는 건 결국 사람, 구성원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회사의 잘못이 아니라 회사의 방향과 의지대로 따라오지 못한 낙오자들의 탓이기 때문이다.
03. 인력 리빌딩
대표이사의 메시지부터 사업 대표의 연간 목표 설정과 목표 달성 시 임직원에게 지급될 달콤한 보상에 대한 발표가 있은 후 오늘의 주인공이자 Main Agenda가 등장한다. '인력 리빌딩'이다. 사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단순히 사람을 내보내서 조직을 줄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우리 조직에 필요한 사람은 얼마든지 뽑고 필요 없는 사람은 내보내겠다는 뜻입니다." 팀장들의 웅성거리는 마음이 맨 뒤에 앉아 있던 나의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업 대표는 한 마디를 더 보낸다. "IN&OUT 이라는 개념입니다. 'IN'이니까 사람을 채용하겠다는 것이고, 'OUT'이니까 기존 직원을 내보내겠다는 것이고요."
그의 말의 속뜻은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말이 가져올 가져올 파장은 매우 컸다. 팀장급 직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만약 업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사람을 줄여야하는 상황이 발생했거나 기존 사업부의 매출이 좋지 않아 사업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대다수의 임직원이 체감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말은 '말 그대로' 읽혔을 것이다. 즉, 구조조정(정리해고)을 하겠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회사는 다시 흑자전환을 이뤄냈고, 재무적 성과는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또 업황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매출액 수준이 인력 규모 대비 양호한 편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성장세와 점유율 확대를 위해서는 되려 공격적인 면모를 지속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팀장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 몇 년간 그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이만큼 성장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업 대표는 앞서 IN과 OUT을 병행하겠다는 말의 모호성을 감지했는지 핵심 메시지를 전한다. "팀장님들이 마음에 안 들거나 우리 조직과 계속 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력이 있다면 이번 평가에서 D등급 주세요.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좋은 인력들 미리 뽑으세요." 드디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실체를 눈으로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업 대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네 가지였다. 첫째, 연간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우리한테 맞는 사람으로 다시 조직을 Re-Organizing 해야 한다. 둘째, 그럴려면 필요 없거나 역량이 안 되는 사람들을 빨리 내보내야 한다. 셋째, 팀장들은 이런 경영 기조에 맞춰 평소에 내보내고 싶었던 사람을 선별해야 한다. 넷째, 선별된 인력들은 D등급을 부여해서 낙인을 지움으로써 정리하면 된다.
04.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려
불과 몇 달전 일이다. 비슷한 직책자 간담회가 있었을 때, 한 팀장이 사업 대표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엄청나게 많은 인력들을 새롭게 채용하다 보니 작년과 비교했을 때 몇 백명이 늘어난 수준까지 왔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볼 때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인력이 많이 늘었을 때 갑자기 희망퇴직을 받는 방식으로 사람을 줄여나가는 회사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비슷하게 하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때 사업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장했고, 지금 사업을 더 키우기 위해 이만한 인력을 채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꽤 많은 인력이 충원되었지만, 이 정도는 이미 우리 경영진들이 예상한 인력 규모이기 때문에 그때와 같이 인력을 줄이는 방법을 활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몇 달 사이에 경영의 기조가 바뀐 것인지 아니면 사업 대표의 마음이 바뀐 것인지 금세 회사는 다른 얼굴을 하고 팀장들에게 구성원의 방출 계획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 인사실장도 평소에 썼던 말이다. 몇 달 전에는 인력을 많이 채용하는 것이 맞았지만, 지금 보니 별 효과가 없다고 느꼈고, 이제 필요 없으니 내보내는 것이 맞다는 논리가 여과없이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모여 있는 오픈 채팅방도 아주 뜨거워질 것이다.
원래 그 채팅방은 매일이 아수라장인 곳이다. 익명의 구성원들은 틈만 나면 위기론을 설파하는 경영진에 대해 긴장과 공포로 조직을 장악하고 자기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연봉과 보상을 받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비판한다. 그리고 사업 대표와 인사 라인 사람들은 상식도 없고 공정심도 없는 집단이라 매번 구성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마음대로 조직을 이래저래 바꿔가며 괴롭히고 있다는 원망을 쏟아낸다. 사업 대표가 밝힌 IN&OUT 발상은 이러한 군중들의 목소리에 칼의 정치로 화답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뭣이 중헌디?' 싫으면 당신들이 나가세요. 나가는 것이 고민된다면 걱정 마세요. 우리 팀장님들이 당신들을 엄선해서 빠른 속도로 집에 보내줄 테니까요."
그야말로 섬뜩하고 기괴한 간담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