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by Yimhyehwa




아버지는 교도관이었다. 은퇴실 때까지 33년을 제복을 입고 삼엄한 곳에 계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어떨 때는 주말 동안 당직을 서기도 하셨다. 외벌이에 친구가 없고 타인을 경계하는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날 서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청소년기의 비행 같이 엇나간 행동을 하면 나의 숨이 헐떡일 때까지 때리셨다.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냐며 몽둥이로 세차게 내리치고, 발길에 온몸이 차일 때면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아버지가 늘 미웠다.


고집스럽고 사람관계를 잘 못했던 아버지는 직장에서 오랜 시간 찬밥 신세였다. 연고도 없고 학연도 없던 아버지는 타고난 성씨마저 그 지역의 비주류 계열이란 이유로 대우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직급 높은 사람에게 술대접을 하거나 명절이 되면 연락을 돌리거나 하는 그 시절의 사회적 문법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것이 늘 속이 상하셨다. 일부러 안 하려는 자신과 실은 하고 싶어도 그동안 그런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온 자신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회식을 가기도 하셨다. 거기서 술만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오셨다. 소리치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직장에서 당한 이름 모를 감정과 서러운 것들을 뱉어냈다. 너무 겁이 나서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고, 왜 저렇게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화가 날 때도 있었다. 린 마음에 그럴 거면 회사를 때려치우면 되지 않나 하며 투덜거렸지만 직장인이 되어보니 깨달았다. 한 곳에 오랜 세월 머물려면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끝없이 인내하고 버텨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자 기꺼이 그럴 수 있는 힘은 가족이 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아버지 뒷모습에 드리운 어둡고 텁텁하고 시렸던 세월 겹겹이 나의 못된 마음이 자라나 당신을 더 할퀴고 버티라며 재촉만 했다.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도 보고, 같이 풍경 좋은 길을 걸어도 보며 부모의 애환을 느끼고 이해해 볼 마음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폭력적으로 대한 걸 사과하지 않 것을 핑계로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바빴다.


어떻게든 자식들이 제 한 몸 건사하게 살 수 있게 없는 형편에도 쪼개고 쪼개어 하나라도 더 주는 게 부모고, 그것의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여겼던 의 가난 속 이야기에는 서로의 내면과 진심을 바라볼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굳어진 살점을 뜯어내고 새 살이 돋도록 보듬지 않았다. 도 아버지도 말을 섞는 것보다 멀리서나마 안부를 묻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익숙해졌다. 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선택을 해놓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어디쯤 왔는지 몰랐을 땐 두리번거렸고,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발길을 멈췄을 땐 내 아이에게 그 못다 한 사랑을 주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