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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May 28. 2020


다름과 느림의 미학

스위스 제네바 살이

제네바에 온 지 곧 2년이 된다. 어느덧 고향과 서울 다음으로 오래 시간을 보낸 도시가 되었다. 여전히 이 도시를 제대로 안다고 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건 여태껏 살아온 환경 중 가장 많은 인종과 국적이 뒤섞인 곳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네바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처음엔 불어를 쓰는 곳이니 언어로 인해 이방인임을 느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근 첫날 트램을 타고 국제기구로 향할수록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들이 내 귀를 자극했다. 미지의 땅에 온 것이다.

 

스위스 연방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제네바 칸톤의 인구 약 40%가 외국인이다. 자세히 봐야 더 매력적인 이 도시의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가본 모든 유럽의 도시를 통틀어 외국인이라서 시선을 받는 일이 가장 적은 곳이다. 해외에서 나의 정체성은 나의 인종과 국적으로 쉽게 한정되곤 하지만, 제네바에서만큼은 이 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시아 여성이어서, 한국인이어서 주목받는 일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놀라운 자유를 선사했다. 다름이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또 다른 좋은 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서른을 앞두고 마침내 완전한 경제적 독립에 성공했지만 손떨리는 물가에 재정적으로는 여전히 학생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타의로 최소한의 소비를 하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어느 나라보다 부유한 스위스 사람들은 검소하기로도 유명하다. 최근 들어 친환경, 지역 소비를 중시하는 경향은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곳에 살다 보니 내 소득의 대부분은 집세와 건강한 식자재 구입에 쓰인다. 미니멀 라이프를 마음으로만 추구해왔지만 많은 유혹과 시선에 굴복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내 소비 습관을 재정립할 수 있어 기쁘다.

외식비와 꾸밈비 지출을 줄여 수영과 스키, 발레에 도전했다. 그럴듯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에 시작한 활동이었다. 하지만 내 몸이 걷기와 숨쉬기 이외의 활동을 그럭저럭해낸다는 것에 스스로가 장했다. 이렇게 겉보다는 안을 채워나가는 이 생활이 무척 마음에 든다. 


제네바의 또 다른 장점은 유럽의 인근 도시를 여행하기 좋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유럽 도시의 공통적인 장점이기도 하다. 저가 항공이나 기차를 타고 주말 동안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차를 타고 30분만 나가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 도시를 여행할 수 있다. 

스위스에 있다가 다른 나라에 가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에 이성을 잃고 만다. 하루에 네다섯 끼를 먹어서 결국엔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는 부작용을 조심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자유 여행의 시대는 종말을 맞을 거라고 예상하는 이들도 있다. 당분간은 스위스만 여행할 수 있다고 해도, 일단은 괜찮을 것 같다.  


스위스 살이 2주년을 맞아 좋은 점에만 집중해보았다. 가끔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워도 선뜻 떠나야겠단 생각을 하지 못한다. 처음에 이곳의 더딘 리듬에 적응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배울 것도 발견할 것도 많다.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주었던 여름의 햇살이 돌아오고 있다. 제네바는 특히 여름이 눈부신 곳이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도시의 여름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모든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이곳에서의 세 번째 여름을 즐겁게 보낼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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