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시시해도 써야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사는 건 큰 복이다. 계절마다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으니깐! 모든 계절을 공평하게 좋아하려 하지만, 여름이 좋은 이유를 열 가지는 더 나열할 수 있다. 여름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여름 하면 떠오르는 근사한 추억 덕분일 것이다.
여름 방학이면 어김없이 할아버지 댁에 갔다. 하루 종일 정체불명의 온갖 벌레와 사투를 벌여야 하고, 더운 날이면 진한 향기가 배가 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시골집이었다. 그래도 방학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이유는 할아버지의 과수원 때문이었다. 자두밭은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남부의 햇살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다. 할아버지는 밭에서 기웃거리는 나를 불러다 자두를 따주셨다. 고심해서 제일 탐스럽고 어여쁜 한 알을 고르셨다. 당분이 많은 맛있는 자두에는 하얀 가루가 뽀얗게 묻어있다. 그 하얀 가루가 사라지고 반짝반짝 윤이 날 때까지 당신의 낡은 셔츠에 닦아 건네셨다. 한 켠에 푹 익어 떨어지거나, 못생긴 자두가 담긴 들통이 줄지어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갓 딴 탱탱한 자두는 특상품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바로 먹기엔 너무 새그러웠다. ('시다'의 경상도 방언) 별로 내키지 않아도, 할아버지 앞에선 신 맛에 찌푸려지는 눈살을 숨기며 먹었다. 나눌 말이 그리 많지 않은 할아버지와 손녀였지만 자두 한알을 두고 나눌 마음은 컸나 보다.
내가 편애한 것은 할아버지의 복숭아였다. 배만큼이나 커다란 백도였다. 팔목을 타고 과즙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는 유럽의 납작 복숭아 저리 가라 할 만큼 달콤했다.
포근한 여름밤 냄새를 맡으면 사랑하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음을 느낀다. 그럼 햇살을 머금은 여름 과일을 잔뜩 산다. 언니는 숨도 안 쉬고 과일을 먹어 해치우는 나를 보고 과일 청소기라고 했다. 복숭아, 자두, 수박, 멜론을 한입 크기로 썰어놓고 종일 먹는 것이 여름날의 행복이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타입의 예술가들이 걷는 길을 생각해보고 싶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예술작품은 길고 긴 인내심의 열매이다. 그들은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기나긴 침묵 후에 비로소 말을 꺼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그 분야에서의 재능이나 천재성이 천천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나 화가들은 표현할 어휘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마침내 가장 적절한 것을 찾아내게 된다. ... 장 지오노는 언젠가 말하기를 5백 페이지의 분량에 담아낼 수 있는 한 사건이 자신의 삶 속에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채로 어느 순간 자신에게 내동댕이쳐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까지 10년, 20년의 세월을 기다릴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