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un 20. 2020

엄마가 굽고 아빠가 발라주는 생선

우리家한식 공모전 2020

엄마의 부엌에는 음악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마와 칼이 만나는 소리, 압력밥솥의 추가 바쁘게 돌아가는 소리, 찌개가 뚝배기를 넘는 소리가 합쳐져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가끔은 이웃 아주머니들의 말소리도 더해졌다. 엄마에게 각종 반찬 레시피를 전수받기 위해 엄마의 부엌을 찾았기 때문이다.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나는 집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며 입을 씰룩거렸다. 사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겐 당연해져 버린 엄마의 음식에 사람들이 감탄해주니 기뻤다. 엄마의 정성이 우리 가족에겐 감사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도 들었다.  


저녁마다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려오면, 공부하는 시늉을 하며 의자 끝에 매달려 엄마의 부름을 기다렸다. 

"간 좀 봐라"

소리가 떨어지게 무섭게 엉덩이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달려갔다. 그리곤 엄마의 손이 건네는 반찬을 모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두부를 넣어 무친 향긋한 톳나물, 부드러운 바다를 머금은 파래무침, 씹을수록 고소한 깨순 볶음까지... 맨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반찬 한입에 금세 식욕이 돌았다. 엄마는 제철 음식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며, 철마다 산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나는 재료로 풍성한 상을 차려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무치고 굽고 찌고, 엄마의 손을 거쳐 다양한 변주가 탄생했다. 요리하는 엄마의 손은 재빠르고 동시에 여유로웠다. 허둥지둥하지 않는 우아한 몸놀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깨 넘어 요리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서일까? 나에게도 어쩐지 요리가 어렵지 않았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땐 엄마에게 전화해 요리법을 묻곤 했다.

"요리에 법이 없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적당히~ 넣어라"

무엇을 물어봐도 시원치 않은 답이 돌아와 그게 뭐냐며 툴툴거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적당히~' 넣어가며 사부작사부작해보니, 어느새 도움 없이도 상상한 맛을 제법 그럴듯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엄마 없이 만든 요리가 엄마의 맛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도 유독 어려운 요리가 있다면 바로 생선구이였다. 굽기만 하면 되는데 매번 실패하는 종목이었다. 내겐 특별히 애틋한 음식이었는데 말이다. 바다를 품은 도시에 산다는 건 꼭 앞바다에서 난 생선을 먹는다는 게 아니라, 바다에서 나는 모든 해산물과 친하다는 의미다. 삼면의 바다에서 온 생선이 자주 상에 올랐다. 육지 기준으로는 최상급이지만 엄마의 기준엔 자잘한 생선은 무를 넣은 조림이 되었다. 몸집이 굵고 실한 생선은 무조건 구이용이었다. 싱싱한 생선에는 별다른 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가 생선을 촉촉하게 구워 상에 올리면, 아빠가 배턴을 이어받았다. 완벽한 분업이었다. 시원시원한 엄마에 비해, 겁 많고 세심한 아빠는 생선 가시를 바르는 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생선을 가르고, 잔가시가 남지 않았는지 몇 번을 살핀 다음에야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삼십 년 넘게 먹어 치운 생선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도 안 되지만, 아직도 살을 바르는 게 엉성하기만 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엄마가 갈치를 굽는 날에는 아빠가 가장 굵은 토막을 골라 가장자리 가시를 빼고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면 커다란 갈빗대를 잡고 뜯듯 갈치 토막을 잡고 신나게 먹는 것이다. 조기나 도미처럼 살점이 부드러운 생선은 살을 발라 밥공기에 수북이 얹어주었다. 숟가락에 오른 밥 반 고기 반을 한가득 퍼먹었다. 엄마가 굽고 아빠가 발라주는 생선은 딸을 향한 확실한 사랑이었다. 


고향을 떠나니 제일 귀한 게 생선이었다. 친구들과 닭갈비나 피자는 먹으러 가도, 생선구이 백반을 먹으러 가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생선 귀한 줄 모르고 자란 딸이 이젠 구경도 못 하고 산다는 비보를 접한 엄마는 부리나케 시장으로 달려갔다. 가장 싱싱한 놈으로 골라 깔끔히 손질해 아이스박스에 넣어 보내주었다. 달군 팬에 올려 굽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구운 생선은 왜 그렇게나 비린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껍질과 살이 사방으로 부서져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있던 식욕도 달아나게 했다. 작은 자취방을 가득 채우는 연기와 잘 빠지지도 않는 냄새도 역해서 그렇게 생선과 작별했다. 두 사람과 함께 있어야 마침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해마다 생일이 되면 이역만리에서 생일상(사진)을 받는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생선구이와 함께


스위스에 와서는 삼만 원짜리 김치찌개에 속이 쓰려 김치까지 담가 먹게 되었다. 이런 마당에 생선구이는 더는 힘든 요리가 아니다. 잠시 이별했던 생선과 화해하고 이따금 바다의 맛이 생각나면 구워 먹곤 한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칼과 포크로만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대가리와 가시를 제거해 상에 올린다. 그러니 마트에서도 생선을 손질해달라고 하면 뼈를 모두 도려내고 토막 내서 준다. 덕분에 무서운 생선 눈알과 마주할 일도 없고 굽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어쩐지 반쪽짜리 생선을 먹는듯한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다.  


후각은 가장 많은 기억을 담은 감각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생선 굽는 냄새를 맡으면 엄마의 식탁에 앉아있는 듯하다. 이 지독한 코로나만 사라지면 13시간을 날아, 또 차로 5시간을 달려 집으로 가야겠다. 대장정의 끝에는 엄마가 굽고 아빠가 발라주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 귀한 사랑을 한입 가득 머금으면 세상 가장 흐뭇한 얼굴로 날 바라볼 두 사람이 어른거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